'푸틴이냐, 나발니냐' 고민에 빠진 러시아 공산당

임규민 기자 2021. 2. 14.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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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지난달 21일(현지 시각)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묘 인근에서 레닌 사망 기념일을 맞아 레닌 초상화, 공산당기(旗), 옛 소련 국기 등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1. 지난 8일(현지 시각) 러시아 서남부 사라토프주(州) 볼가강 유역의 한 아파트. 이날 아침 구독자 127만명의 러시아 유명 정치 유튜버 니콜라이 본다렌코는 이곳 자택을 나서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에 붙잡혔다. 앞선 주말에 벌어진 러시아 야권의 구심점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것이다. 그는 지난달 17일 나발니가 독극물 테러를 당해 독일에서 치료 받은 뒤 5개월 만에 귀국했을 당시에도 그와 만나기 위해 나발니가 도착 예정인 공항에 마중나갔을 정도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의 또 다른 직업은 현지 시의회 부의장, 그의 당적은 공산당이다.

#2. 지난달 23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13차 전체 회의. 29년째 당수(黨首)를 맡고 있는 76세의 노(老)정객 겐나디 주가노프가 연단에 선 채 자리에 앉은 당원들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어떤 공산주의자도 (나발니 측의 정부에 대한) 도발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나발니를 “초국적 거대 자본이 기획한 ‘색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러시아에 보내진 요원”이라며 비난했다. ‘색깔 혁명’이란 우크라이나·몰도바 등 옛 소련 국가에서 발생한 일련의 정권 교체 운동을 뜻한다. 이어 그는 “이는 조국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나발니가 새 미국 대통령 당선 직후 곧바로 축하 인사를 건넨 까닭이 여기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공산당 당수 겐나디 주가노프가 지난달 23일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13차 전체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타스 연합뉴스

내년 소련 건국 100주년을 맞이하는 러시아 공산당이 내홍을 겪고 있다.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해체됐던 소련 공산당은 1993년 2월 후신인 러시아 공산당으로 부활했다. 소련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1995년 총선에서 한때 제1당에 오르기도 했다. 시대착오적이란 이유로 점차 인기를 잃었지만, 현재 러시아 두마(하원) 총 450석 중 43석을 차지해 명실상부 제2당을 유지할 만큼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政敵) 나발니를 둘러싼 입장 차로 그간 곪아온 분열이 이번에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산당의 나발니 지지 목소리는 신진 간부들과 평당원들로부터 주로 흘러나오고 있다. 러시아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모스크바뿐 아니라 카잔·하바롭스크 등 지방에서 상당수 공산당 소속 지방 의원들과 평당원들이 나발니 석방 시위에 참가해 구금됐다. 우랄 지역 페름 등 일부 지역에선 신구(新舊) 세력이 친(親)나발니 여부로 파를 갈라 당권 경쟁을 하는 현상도 생기고 있다고 한다. 과거 한목소리로 나발니를 자유 시장·민영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라 비판하던 분위기와는 대조적이다.

구독자 127만명의 러시아 유명 정치 유튜버 니콜라이 본다렌코가 지난달 17일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귀국을 기다리는 시민과 셀카를 찍고 있다. /니콜라이 본다렌코 유튜브 캡처

이 같은 변화는 과거부터 조금씩 움트던 신구 세력 간 노선 대립에서 기인한다. 공산당이 재창당 직후 급속히 인기를 모을 수 있었던 건 공산주의 사상 자체보다는 옛 소련 영광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 향수를 기반으로 1995년 총선과 1996년 대선에서 돌풍을 맛본 주가노프는 소련 시절의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를 중점적으로 부각했다. 이는 푸틴이 내세우는 강한 중앙 정부·크림반도 합병·반(反)동성애 등에 대한 지지로도 이어졌다.

반면 소련 붕괴 이후 유입된 신진 세력들은 기존에 내세우던 ‘강한 국가’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신 이데올로기에 더 천착하는 경향을 드러내왔다. 전통적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난 최신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도 전향적이다. 알렉산드르 키네프 전 모스크바고등경제대 교수는 모스크바타임스에 “공산당 내 젊은층은 현대 유럽 좌파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며 “소련 시대 수사와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 무의미하다”고 평했다.

당장 오는 9월에 있을 총선이 양자 간의 노선 분리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발니가 푸틴에 맞서는 이미지를 꾸준히 구축하며 젊은층을 중심으로 전국적 인기를 쌓아올린 데 비해, 공산당은 노년층에 머문 저변 확장에 실패했다. 2016년 공산당은 총선을 앞두고 젊은 이미지로 재탄생시킨 레닌·마르크스가 등장하는 포스터를 만들며 지지를 호소했으나, “얄팍한 수”라는 혹평을 듣고 의석이 절반 이하로 줄며 참패했다.

/러시아 공산당 제작 포스터
/러시아 공산당 제작 포스터

최근 나발니를 반동(反動)으로 공격하며 색깔론을 들이민 데 대해서도 당원들에게조차 공감을 얻지 못하며 실기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나발니 지지 집회에 나섰다 구금됐던 예브게니 스투핀 모스크바 시의회 의원은 모스크바타임스에 “나와 주가노프와의 정치적 입장 차이는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미 공산당 일부 지방 조직 차원에선 이번 총선에서 나발니 측과의 선거 연대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며 정치적으로 성장한 나발니는 유튜브 구독자만 240만명이 넘는 등 강력한 온라인 매체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유권자가 자신의 거주지를 입력하면 그 선거구 내에서 여당을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를 알려주는 ‘스마트 투표(Smart Voting)’ 앱을 활용해 2019년 모스크바 시의원 선거에서 다수 여당 후보를 낙선시켰다.

주가노프는 8일 본다렌코 등 당국에 구금된 당원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국영 매체에 밝혔다. 그러나 당내 나발니에 대한 입장 차는 여전해 총선까지 노선 대립은 심화될 전망이다. 알렉세이 마카르킨 러시아 모스크바 정치기술센터 부회장은 모스크바타임스에 “공산당은 현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루스(반인반마)와 같다”고 평했다.

러시아 공산당 노년층 지지자들이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작년 12월 21일 옛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탄생 141주년을 맞아 이곳 스탈린 묘로 헌화를 하러 가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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