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의 '봄날'은 언제 올까요?
처음엔,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아주 비장했고 그만큼 자신감에 넘쳤다.
북한 당국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2020년 6월16일) 직후 전임 김연철 장관이 남북관계 재개를 위한 제단에 올릴 희생양을 자처하며 물러난 터라 이인영 장관의 첫걸음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7월27일 오전 11시45분 임명을 재가하자, 이인영 장관은 취임식·취임사도 없이 업무를 시작했다.
이 장관은 취임사 대신 한 문장짜리 문자 메시지를 통일부 직원들한테 보냈다. “전략적 행보로 대담한 변화를 만들고, 남북의 시간에 통일부가 중심이 됩시다.” 이 장관은 다음날엔 통일부 간부들을 불러모아 ‘자유토론’을 벌이며 “기다림의 자세를 넘어서, 차고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다. 취임 초 이 장관은 “아주 대담한 변화”와 “창의적 발상”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북쪽은 깊은 ‘침묵’으로 그를 대했다. 그 침묵이 탐색인지 주시인지 외면인지 무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 장관의 곡진한 대북 제안과 호소는 번번이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장관의 ‘말’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이 장관한테 물어봤다. 여의도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에 비해,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7층에서 통일부 장관으로 일하며 남북관계를 대하는 태도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지난해 11월24일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이 장관을 따로 인터뷰하는 자리에서다.
이 장관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생각을 갈무리하느라 중간중간 숨을 고르는 특유의 조심스런 말투로 답변을 이어갔다. “음…(고민하는 표정)… 국회의원 할 때는 ‘남북관계가 왜 이렇게 더디지? (정부가 일을) 왜 이렇게 답답하게 하지?’라는 생각을 좀 했다.”
2020년 7월3일 청와대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를 발표하며 이렇게 소개했다. “민주화 운동가 출신의 4선 국회의원으로 더불어민주당 남북관계발전 및 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관계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집권당 원내대표 출신의 4선 의원 이인영’이 통일부 장관으로서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로 첫걸음을 내딛은 게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통일부 장관이 전문성이 있고 자신감에 넘친다고 남북관계가 순풍을 탄다면, 우리가 분단 70년 세월을 이리 비참하게 살아오지는 않았을 터. ‘북한을 상대로는 그 어떤 장담이나 단정적 예측을 삼가라’라는 경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 장관은 장관이 된 뒤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막상 (통일부 장관으로) 와서 보니까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더라. 꽤 어렵다는 생각도 한다. 평양의 응답이 없으니까….”
이 장관의 고백처럼, 북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되는 일이 없다. 통일부 차원의 당국 간 대화는커녕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도 끊긴 지 오래다.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방역이라는 이중 장애물에 막혀 숨구멍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다. 심지어 남북 당국회담에서 통일부 장관의 북쪽 상대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이 누군지, 있기는 한 건지조차 이 장관은 아직 알지 못한다. 조평통 위원장이던 리선권이 2020년 1월 외무상으로 자리를 옮긴 뒤 새 조평통 위원장이 임명됐다는 소식은 아직도 없다.
하지만 세상에 나쁘기만한 일은 없다. 북의 침묵도 마찬가지일 터. 북은 정세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기네가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면 당국 공식 발표문조차 상대에 대한 욕설로 도배를 하는 민망한 의사 표현 습관을 갖고 있다. 지난해 12월5일 강경화 당시 외교부 장관이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는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를 “믿기 어렵다”고 국제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실을 두고,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개인 담화(2020년 12월8일)를 내어 “얼어붙은 북남관계에 더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어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 모양”이라며 “강경화의 망언(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라고 실명 저격한 게 최근의 한 사례다.
그런데 이인영 장관은 지난해 7월 취임 뒤 지금껏 단 한번도 북한 당국이나 북쪽 ‘3대 주요 매체’한테 실명 저격을 당하지 않았다. 최소한 북쪽이 이 장관을 “상종 못할 종자”로 여기진 않는다는 방증이다. 이 장관을 향한 북의 오랜 침묵은 아마도 주시의 다른 얼굴일 터인데, 어쩌면 얼마간의 호감이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들어 이 장관은 3월로 예정된 한·미 연합군사연습과 관련한 공개 발언을 자주 한다. 지난 1일 <티비에스>(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와선 “통일부 장관으로서 군사훈련이 많은 것보다 평화회담이 많은 것을 당연히 원한다”고 했다. 그러곤 “정치인의 입장”이라는 안전장치를 달아 “군사훈련이 연기돼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데로 물꼬를 틀 수 있다면 그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표현은 조심스럽지만, 한·미 군사훈련 연기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한 셈이다.
이 장관의 이런 행보는 조선노동당 8차 대회(1월5~12일)와 조 바이든 미국 새 행정부 출범(1월20일)을 계기로, 2019년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장기 교착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던 “한반도 정세가 변곡점에 진입했다”(1월25일 통일부 출입기자 간담회)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짚자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노동당 8차 대회 연설을 염두에 둔 남북관계 재개 길닦기의 일환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1월5~7일 당대회 연설에서 “파국에 처한 북남관계를 수습하고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해나가야 한다”며 “미국과의 합동군사연습 중지”를 남쪽에 촉구했다. 이 장관은 특히 김정은 총비서가 “3년 전 봄날”과 “평화와 번영의 새 출발점”을 굳이 입에 올린 사실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알다시피, ‘3년 전 봄날’엔 문재인 대통령과 김 총비서의 첫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2018년 4월27일).
이 장관의 바람대로 3월 한·미 군사훈련을 대폭 축소하거나 중단한다고 북쪽이 바로 남북 당국회담 등 관계 재개에 적극 나선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한·미 훈련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남북 당국 관계의 교착 국면이 더 길어질 위험이 커지는 건 불문가지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갈등이 급속도로 높아질 위험도 있다.
자연계에선 때가 되면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겠지만, 인간계엔 사람의 애씀 없이 ‘봄’이 오지 않는 게 세상 이치다. 이인영 장관의 곡진한 애씀은 봄바람과 함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하여 이 장관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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