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경제]유명희 WTO 총장 도전기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후보직에서 결국 물러났습니다. 지난해 6월 한국인 최초 사무총장을 목표로 선거에 뛰어든 지 7개월 여 만입니다. 이 기간 선거 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몇 가지 사건을 정리해봤습니다.
WTO 회원국간 선출 협의 절차인 1·2라운드를 거쳐 최종 후보자가 두 명으로 좁혀진 지난해 10월. 유럽연합(EU) 회원국 대사들은 결선에 진출한 유 본부장과 오콘조이웨알라 나이지리아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지 의견을 모으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당시 독일·프랑스 등 주요국은 나이지리아 후보에 표를 던질 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EU는 과거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쳐왔고 현재도 여러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프리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을 총장으로 세우면 WTO 내 자신들의 입김이 세질 것이라 본 듯합니다.
미국과 가까운 한국 후보에 대한 견제 심리도 작용했습니다. EU는 에어버스에 대한 보조금 문제부터 WTO 상소기구 복원 문제까지 여러 현안을 놓고 미국과 맞부딪히고 있습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앞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철강 수출규제를 발동했을 때 EU는 한국이 함께 맞서 싸워주길 바랐던 것 같다”며 “기대와 달리 한국이 수출규제를 바로 수용하자 EU 회원국들 사이에서 ‘한국은 미국편’이라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헝가리와 라트비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유 본부장을 지지했다고 합니다. 한국이 자국과 긴밀한 경제적 관계를 갖고 있고 유 본부장이 통상 분야에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입니다. 하지만 역내 영향력이 큰 독일·프랑스 등의 뜻에 못 이겨 결국 나이지리아 후보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입니다.
EU가 아프리카 후보에 표를 몰아주면서 판세는 적잖이 기울었습니다. 아프리카 44개국, 유럽 37개국의 표는 전체 회원국 표의 절반에 달합니다. EU 표를 분산하는 동시에 다른 회원국의 고른 지지를 이끌어내려던 정부의 선거 전략도 흔들렸습니다.
남은 표를 모두 끌어오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웃나리인 일본은 ‘한국 후보는 절대 안된다'며 주변국에 한국 후보를 지지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이번 선거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일본은 선거 초반부터 유 본부장 낙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며 “일본이 직접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명목상 한 표 뿐이지만 동남아시아처럼 일본과 경제적 유대 관계가 깊은 지역의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 못한다”고 했습니다.
EU의 결정이 있고나서 며칠 뒤. WTO는 10월 28일 164개 회원국의 제네바 주재 대사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전체회의를 열고 선호도 조사 끝에 오콘조이웰라 후보가 더 많은 득표를 했다고 공개 발표했습니다. 최종 라운드에 오른 두 후보의 구체적인 선호도 득표 숫자는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선호도가 높은 쪽으로 컨센서스를 이룬 쪽은 나이지리아 후보“라고 못 박은 겁니다.
이 같은 결과를 전달 받은 유 본부장은 사퇴 의사를 굳혔다고 합니다. 관례상 결선에서 뒤진 후보는 중도 포기를 택해왔으며 다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자가 만장일치의 형태로 사무총장에 추대돼왔기 때문이죠. 정부의 한 관계자는 “선호도 조사 결과가 나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거 캠페인을 함께 치룬 사람들을에게 ‘그간 고생했다’며 사퇴할 뜻을 전했다”며 “우리로선 최종 라운드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헌데 선호도 조사 결과가 공개된 당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미국은 유명희 본부장을 차기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으로 선출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놓습니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인사는 유 본부장 측에 “사퇴하지 말라”는 뜻을 직접 전했다고 합니다.
‘고해’로 불릴 만큼 비밀주의가 특성인 선거 절차에서 회원국이 이처럼 공개적인 의견을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선호도 조사 결과 아프리카 후보로 표가 쏠리긴 했지만 이후 이견을 듣는 절차가 생략된 점이 트럼프 정부의 심기를 거스른 듯 합니다. EU 뿐 아니라 중국과도 가까운 아프리카 후보가 사무총장에 오르는 게 그렇잖아도 마뜩찮은 상황에서요. 한 통상 전문가는 “만에 하나 트럼프가 재선되면 사무총장 인선이 기약없이 미뤄질 수 있다고 보고 WTO 사무국이 총장 인선을 서두른 것 같다”며 “미국 입장에선 사무국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강하게 반발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별난’ 지원으로 유 본부장의 사퇴는 미뤄졌습니다. 하지만 표심이 한 쪽으로 쏠리면 패한 후보는 자진 사퇴하고 회원국간 협의를 거쳐 만장일치로 총장을 세우는 게 그간의 관례였습니다. 거취 고민이 길어지면서 다른 회원국으로부터 ‘한국이 미국 편에 서서 국제기구를 무력화한다’는 비판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정부 내부에서는 “미국 눈치를 보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리 모습을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보겠나”라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지난 5일 유 본부장은 예정에 없던 언론 브리핑을 열었습니다. 선거 절차가 중단된 지 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유 본부장은 이날 WTO 차기 사무총장 후보직을 사퇴하고 이를 WTO에 통보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유 본부장은 "사무총장 선출 문제에 대해 회원국들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후보직을 유지하면서 컨센서스 도출을 기다려왔다"며 "그러나 최종 결선 결과 발표 후 수개월 지났음에도 합의를 못 하면서 WTO의 리더십 공백이 장기화하고, WTO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유 본부장이 거취를 정리하기로 최종 결정한 것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최근 유 본부장의 사퇴 의사를 수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선출 절차를 더는 지연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측 입장을 다자무역체제의 복원을 내건 바이든 신임 정부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바이든 정부 내에서 WTO 사무총장 후보자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며 “지난 4일께 유 본부장의 사퇴 결정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우리 측에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종=김우보 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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