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녹색 파래·에메랄드 물빛.. 봄은 제주바다로부터 밀려온다
제주에는 봄의 전령들이 이미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한라산 정상은 아직 한겨울의 잔설(殘雪)이 남았지만, 바닷가에 부는 바람은 향긋한 봄 향기가 제법 배어 있다.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사계리 해안. 180만년 전 수중 폭발로 생겨난 응회암층이 파도와 바람에 의해 깎여나간 다채로운 모양의 암석들이 널려 있고, 한쪽 끝에는 그 암석이 잘게 부서지면서 ‘검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다. 마치 화성에 와 있는 듯 이채로운 풍경으로 유명한 이곳 해변에도 봄이 완연하다. 그 주인공은 단연 연녹색의 파래. 검은 해변을 포근하게 감싼 연녹색 파래가 겨울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냈다. 동트는 새벽, 한 줄기 태양빛을 배경으로 검은 암석 위로 파릇파릇 돋아난 해초의 모습이 ‘태초의 땅’을 연상케 한다. 제주의 봄은 이렇게 바다로부터 밀려오고 있었다.
봄의 첫 전령 파래를 영접한 뒤 성산일출봉으로 향하는 길. ‘광치기해변’이라는 팻말이 재미있어 잠시 차를 세웠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모래사장과 온돌을 깔아놓은 듯한 해변의 암석, 펄펄 끓던 용암이 바다와 만나 형성된 기기묘묘한 풍경을 이름 모를 해초가 완성하고 있었다. 콧등을 스치는 바닷바람에선 역시 기분 좋은 봄 향기가 났다. 에메랄드 빛으로 부서지는 파도와 그 위를 유유히 나는 갈매기들, 태동하는 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광치기'라는 해변의 원래 이름은 ‘관치기'였다. 제주의 전통 배 ‘테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거친 풍랑에 목숨을 잃은 어부들의 시신이 이 곳 해변에 떠밀려 오면, 주민들은 관을 짜 시신을 수습했다. 평온하기 그지 없던 파도가 갑자기 싸하게 느껴진다. 해변의 역사와 유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랑에 빠진 커플은 물 빠진 해변 암석 위에서 갖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 귀하디 귀한 '자연의 향신료’ 덕분에 제주의 봄은 충만해지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성산일출봉 입구에 다다르니 그 동안의 제주 바람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듯,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눈을 뜨기도 힘들고 입가엔 바닷물의 짠 기마저 느껴졌다. 깎아지른 듯 수 백 미터 절벽 아래에 점점이 박힌 검은 암석이 짙푸른 파도를 만나 만들어낸 풍광은 한 폭의 수채화보다 더 수채화 같았다. 바닷물이 일렁이는 태양빛을 받아 은갈치처럼 빛났고, 인근 해변을 산책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따스한 봄 햇살 만큼 정겨웠다.
바다와 인접한 호수 '용연'에도 봄소식이 깃들었다. 계곡 양쪽 기암괴석과 푸른 소나무를 배경으로 옛 선인들이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가 들어서 있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줄지어 핀 동백꽃의 청초한 붉은빛이 바닷물과 계곡물이 섞여 만들어낸 신비로운 물색과 어우러져 탐방객의 마음을 빼앗는다. 용이 승천하면서 비를 내리게 했다는 전설이 과연 어울릴법하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카메라를 챙겨 노을이 가장 아름답다는 '미항' 서귀포항으로 향했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가는 다리’라는 뜻의 새연교가 생긴 뒤 야경 명소가 됐지만, 새연교 뒤편 범섬 위로 펼쳐지는 보랏빛 노을과 푸른 밤이 만나는 풍경 또한 아름답다. 노을색이 이렇게 다채로웠던가, 자줏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노을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보랏빛으로 변하더니 마지막엔 하늘 전체를 푸르게 뒤덮었다. 노을의 향연에 취해 맞이한 제주의 푸른밤 또한 봄의 전령이었나 보다.
설 연휴 기간 제주에는 약 14만명의 여행객이 방문할 것으로 전망된다. 희망찬 새해 첫출발을 다짐하기 위해,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상처 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다 건너 제주를 찾는 사람들. 푸릇푸릇함 속에 ‘치유의 생명력’이 넘쳐나는 제주는 그들에게 조용한 위로 그 자체다. 코로나19 확산 없이 모두가 안전하게 제주의 봄을 만끽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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