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의문사한 아들, 못 다한 그 날의 이야기

2021. 2. 13.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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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박창수 위원장은 참 헌신적이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제일 먼저 죽죠. 이 사회에서는 박창수 같은 사람들, 용기있고 앞장서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고 제일 먼저 잘리고 제일 먼저 구속된 역사가 있어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제일 먼저 죽고’

한진중공업에는 네 명의 ‘노동 열사’가 있다. 이른바 민주노조의 첫 위원장이었던 박창수가 첫 번째 죽음이었다. 박창수는 1991년 5월 의문사했다. 아버지 황지익씨는 “참으로 우리한테는 긴 시간이오. 30주기가 된 심경을 어떻게 답변을 하겠소. 말로서는 표현을 못하는거요. 부모들은…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는데,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모르는거요”라고 말했다.

30년 동안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지만 박창수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가족은 사건 당일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지난 2월 2일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황씨 부부 자택에서 아버지 황씨, 어머니 김정자씨, 막냇동생 황인선씨를 만났다.

박창수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어머니 김정자씨와 아버지 황지익씨가 자택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우철훈 선임기자
-여러 기록에 보면 박창수는 당시 노조위원장 이미지와는 다르게 차분하고 다정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황인선
“큰오빠는 참 다정했어요. 소풍날 도시락을 싸주면 저희 준다고 그대로 남겨오고 그랬어요. 저랑 12살 차이가 나니까 오빠 손을 많이 탔습니다. 뭘 잘못하면 큰오빠가 회초리를 들었는데, 때리고 나면 안티프라민을 발라주고 꼭 라면땅을 사줬어요.”

-그래서일까요. 93% 지지로 노조위원장이 됐습니다.

황지익
“처음에는 회계 감사를 맡았다고 해요. ‘한푼 한푼이 아까운데 허투루 쓰면 안 된다. 철두철미하게 하라’ 그랬죠. 그러다가 노조위원장이 됐다고 하기에 덜컥 걱정이 드는거에요. 야 그거 뭣하러 하냐. 요새 어디 잡혀갔다 하면 노조위원장인데 왜 그걸 맡았나?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90%넘게 지지를 한다고 뿌리칠 수가 없다고 해요. 동생들한테는 ‘야, 형이 이렇게 인기가 많다’고 농담으로 해.”

-1991년 5월 6일, 박창수 위원장이 사망했습니다. 가족이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는데요.

황지익
“새벽 5시도 안 됐을 때, 전화가 왔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부랴부랴 창수가 입원한 안양병원으로 갔어요. 엄마는 (시신을) 보면 안 되니까 꼼짝 못하게 해놓고 김형태 변호사랑 시신을 보러 갔어요. 내가 죽어도 그 장면은 못 잊어요. 자살했다는 애가 링겔을 그대로 꽂고있고 붕대도 감겨있어. 링겔 파편이 1.5m 반경에 퍼져있는데, 참 이거는 말이 안 돼. 우리가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다 찍었는데 경찰서장이랑 담당 검사가 카메라를 빼앗아갔어요.”

-당시 병원 상황은 좀 어땠나요.

황인선
“어떤 청년 무리들이 ‘아 이거 좀 심각한 거 같다. 우리 말 맞춰야 돼’라고 했어요. 그쪽도 저를 모르고 저도 그쪽을 모르는 상황이니까 그런 말이 나온거죠. 엄마한테 바로 가서 ‘엄마, 어떤 사람들이 말을 맞춘대’ 말했죠. 병실에서 오빠 침대가 제일 안쪽이었어요. 우리가 시신을 지키고 있었거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엄마가 대걸레 봉을 무릎으로 부러뜨리더니 ‘가까이 오면 찔러서 다 죽여버린다’고 악을 썼어요. 그러고 있을 때 노조 사람들이 도착했어요. 그 청년 무리들이 누군지는 결국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유족과 부검에 합의했습니다.

황지익
“당일 12시에, 우리가 아는 변호사, 우리가 아는 의사가 참석하는 부검을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영안실로 올라갔어요. 밥을 먹고 있는데 박종환 검사랑 경찰이 오더니 시신을 가져가겠다고 합디다. 애들 엄마가 ‘나는 자식이 죽은 사람이야, 무서울 것도 없어’ 이러면서 박 검사 따귀를 때렸어요. 그리고 다음 날 백골단이 벽을 부수고 들어온 거에요.”

백골단이 박창수 전 위원장을 시신을 빼앗아간뒤, 가족들이 병원에서 항의하고 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백골단이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장면은 어떻게 사진으로 남게 됐나요. 현장에 사진기자가 있었나요.

황지익
“영안실에 있는데 병풍이 들썩들썩해요. 병풍 뒤로 가봤는데 아무도 없어. 그런데 카메라가 위에서 내려와요. 아, 카메라를 내려보내는 거 보니 우리편이구나! 카메라를 덥석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진 기자가 내려왔어요. 어디 기자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한겨레에 사진이 실린 거 보고 알았습니다.”

황인선 “그 날 영안실에서 다 쫓겨났는데, 나중에 보니까 화장실 쓰레기통에 필름이 있는거에요. 그 사진 기자가 어차피 카메라는 뺏길 거니까 ‘모 아니면 도’로 화장실 쓰레기통에 필름을 버리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 사진이라도 있는거에요. 그 사진마저 없었으면…”

-정부나 회사 측에서 회유는 없었나요.

황지익
“깨끗하게 화장하면 10억을 준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회유했던 게 아버지야. 성이 다르니까 돈이면 넘어갈거라고 생각한거지. 나는 진상만 원한다 돈은 필요없다고 하니까, 의붓아비 소리가 나와요. 가족을 갈리치기 하는 거야. 의붓아비라고 괄세를 받아도 내가 기른 새끼가 죽었는데 진상을 밝혀야지.”

황인선 “큰오빠 시신을 들고 부산에 갔을 때 ‘한진 회장이 일본에 있다가 부산에 왔다가 장례 치른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했으면 진숙 언니가 복직했을 것 같고 주익이 아저씨도 그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랬다면 오빠는 갔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아프진 않았겠죠.”

-네살 때부터 박 위원장을 키웠습니다. 성을 바꿀 수도 있었을텐데요.

황인선
“엄마는 성을 바꿔주고 싶어했는데 아버지가 반대했어요. 아버지는 성이 뿌리라고 생각하셨어요. 오빠가 나중에 자식을 낳을텐데 뿌리를 이어가야 한다는 거죠. 이래도 내 자식이고 저래도 내 자식인데 성이 무슨 상관이냐. 그런데 나중에 그 부분이 트집 잡히면서 부모님이 많이 서운해하셨죠.”

-의문사 이후 가족들의 삶도 바뀌었지요?

황인선
“엄마는 큰오빠가 노조 활동하는 걸 모르셨어요. 오빠가 엄마 걱정할까봐 그런 일은 전부 아버지랑 상의했거든요. 학생들이 데모하는 거 보면 ‘부모가 애써 키워줬더니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데모한다’ 그랬는데, 오빠 일을 겪고 나니 세상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셨던 거 같아요. 부모님이 진상규명 해달라고 정말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셨습니다.”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자살이 아닌 의문사로 사인을 정정했습니다.

황지익
“그렇긴하지만 조사를 보면 완전히 엉터리에요. 젊은 남자 두 명이 창수를 데리고 갔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이 누군지,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와서 이야기를 해주면 좋은데, 그 병원 간호사도 사라져버리고 다 사라져버렸어요. 정부가 당시 병원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으려고 하면 왜 못 찾겠습니까. 찾으려는 의지가 없는거지. 그냥 엉터리로 남는 겁니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답답할 것 같습니다.

황지익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도 1세대는 거의 없습니다. 유가협에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한숨) 자식을 잃은 부모가 뜨거운 밥이라고 하면, 그 자식 세대는 식은 밥이고, 그 밑에 손주 세대는 쉰밥이라고 해요. 안타깝지만 자연스러운 겁니다. 우리 창수 진상규명이 부모에게는 풀지 못한 영원한 숙제처럼 남았습니다.”

-5월이면 30년이 되는데, 남은 과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황지익
“창수 진상 규명이 되면 좋겠지만…아무리 정권이 바뀌어도 억울하게 당하는 건 노동자야.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진숙이(김진숙 지도위원) 복직시키라고 서울에서 농성을 한다고 합디다. 나도 서울로 달려가 피켓을 들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황인선 “엄마가 30년 동안 한 번도 큰오빠 추모제에 못가셨어요.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 모시고 작은 차라도 한 대 빌려서 가는 게 제 소원입니다. 암마가 단정적으로 말씀은 안 하시지만, 본인이 돌아가시고 나면 큰오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세요. 엄마아빠 안 계셔도 우리가 책임지고 진상 규명은 이어나갈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 같이 추모제에 가고 싶습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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