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선만 같으면 '공정'할까?..책으로 살펴보는 '공정'
[경향신문]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
‘공정’은 한국사회 최대 화두다. 경향신문이 진행한 올해 신년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4명(40.7%)은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을 꼽았다. 평등, 자유, 협력, 성장 등 다른 선택지의 비중은 각각 10% 남짓이었다. 하지만 저마다 해석하는 ‘공정’의 의미는 제각각이다. 출발선만 같으면 ‘공정’한 것일까. 저마다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경쟁을 진정 ‘공정’하다 말할 수 있을까. ‘공정’ 담론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책들을 담아봤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극소수 사람들의 영웅적인 성공 사례에 고무되어 다른 이들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이 벗어나고픈 환경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불평등의 해답은 이동성’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정치를 추구할 수 있다. 장벽을 허무는 일은 좋다. 누구도 가난이나 편견 때문에 출세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탈출할 수 있다’는 약속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2010년 한국 사회에 ‘정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의 신간이다.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 능력주의는 개개인의 재능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공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샌델은 ‘노력한 대로 받는다’는 능력주의 이상이 허구라고, ‘공정함은 곧 정의’라는 통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샌델은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가혹한 현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재능은 행운의 결과이며, 재능을 보상받는 사회에 산다는 것 역시 우연이라고 지적한다.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받던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능력주의 정당성의 근거로 꼽히는 ‘노력’ 역시 어느 정도까지만 진실이다.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만큼 연습한다고 그처럼 헤엄을 잘 칠 수 없지 않냐는 것이다.
샌델은 능력주의 문제의 핵심을 대학으로 보고, 추첨을 통한 입학 등 파격적 대안을 내놓는다. ‘공정’하기 위해선 무엇을 고려해야할지, 불평등 해소를 위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진다.
▶[책과 삶]능력주의 허구를 파헤친 ‘샌델의 정의’
■20 VS 80의 사회 | 리처드 리브스
중상류층의 위선적인 태도와 불공정한 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이다. 기존의 1% 대 99%의 대결 구도를 벗어나 상위 20%의 ‘중상류층’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저자는 20%의 중상류층은 다수 대중과 같은 배를 타지 않았으며, 실제로는 상당히 유리하고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각종 소득 통계를 통해 상위 20%를 경계로 불평등의 단층선이 그어져 있다고 보여준다. 20%가 자신들 아래 80%와 격차를 벌리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위선’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 핵심적 주장이다.
이 책에서도 불평등의 최전선은 ‘교육’이다. 중상류층의 고소득이 고학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일자리에 있어 ‘기회의 사재기’를 낳고 있다고 지적한다. “운동장은 평평한지 몰라도, 어떤 아이들은 밤과 주말에 미리 연습해 경기에 대비한다… 능력의 피라미드는 부와 문화 자본의 피라미드를 반영하게 되었다.” 그들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
저자는 “아메리칸 드림은 죽지 않았다. 살아있지만 중상류층인 우리가 그 꿈을 사재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는 있다. 그런데 개천물이 말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대로 겹쳐지는 책이다.
▶[책과 삶]다 1% 탓?…20%의 ‘위선’을 벗기다
■엘리트 세습 | 대니얼 마코비치
실력대로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능력주의가 엘리트들도 자기파멸로 이끈다고 비판하는 책이다. 능력주의만큼 공정한 것은 없어 보인다. 능력대로 경쟁해서, 능력만큼 가져가는 사회라면 누구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하면 더 노력하면 되고, 그만큼 성취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능력주의에 기반해 만들어진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까’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불행하게도 능력주의 기반 사회에서 계층 상승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엘리트라는 자리는 ‘교육’을 통해 사실상 세습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능력주의 사회에선 최상층 엘리트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오늘날 젊은 투자은행 간부들은 대체로 오전 6시에 출근해 자정까지도 퇴근하지 않으면서 주당 80~120시간씩 일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이든, 최상층에 자리잡은 사람이든 삶의 질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능력주의가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평등”을 통해 소득과 생산을 남들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래야 엘리트는 자유와 여가를 되찾고, 중산층은 소득과 지위를 높일 수 있다.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한가…신간 <엘리트 세습>
■능력주의 | 마이클 영
영국 출신 사회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마이클 영의 사회학적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전 세계적 화두로 떠오른 ‘능력주의(Meritocracy)’의 기원이 된 책이다. 지능과 능력이 사회의 원리가 된 2034년 미래 영국에서 계급화가 고착되며 폭동이 일어나는 사회를 그렸다.
이야기는 1958년을 기점으로 나뉜다. 1958년 이전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그 뒤는 현실의 흐름을 바탕으로 예상하고 상상한 허구다. 영은 ‘능력주의’라는 단어와 ‘지능(I)+노력(E)=능력(M)’이라는 도식을 만들었다. 능력주의 사회는 지능을 기준으로 능력, 실력, 업적, 재능을 가늠하는 사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일부 기득권층과 세습 엘리트들만의 출세 사다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엘리트들의 능력은 기득권 계급의 자격증이 되고, 능력 있는 엘리트들의 계급은 자식 세대로 이어진다. 한동안 순조롭게 작동하던 능력주의 체제는 계급 간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지면서 계층 사이 사회적 이동이 가로막히자, 포퓰리스트 운동이라는 저항에 직면하며 파국을 맞게 된다.
‘능력에 따른 보상’의 공정을 신앙하는 한국 사회 역시 단 한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시스템을 신뢰하고 있다. 앙상한 도식의 능력주의는 언제까지 기능할 수 있을지 진지한 성찰을 촉구한다.
▶[아침을 열며]우리를 갈라놓는 능력주의
■불평등의 세대 | 이철승
2019년 한국사회 세대론과 불평등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주목받은 책이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386세대가 한국 사회의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을 독점해온 과정과 그로 인해 어떻게 세대 간 불평등을 야기해왔는지를 다양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저자는 민주주의 완성과 불평등의 심화가 공존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명하기 위해 세대론을 꺼내 든다. 책에선 386세대를 중심축으로 놓고 그들이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을 가로지르며 권력 자원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사회 곳곳의 최상층을 차지한 386세대의 자리 독점은 이제 형평성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비효율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라는 비판이다. 세대 간 그리고 세대 내 불평등과 그 재생산 구조를 어떻게 바꿀지를 논의하며, 노동개혁 방안을 제시한다.
▶[화제의 책]한국형 위계구조 속 정치·시장 권력 장악한 386세대, ‘2차 희생’으로 불평등 혁파 나서야
신작 <쌀, 재난, 국가>에선 논지를 확장해 한국사회 불평등의 기원을 ‘벼농사 체제’에서 찾는다. ‘쌀’ ‘재난’ ‘국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경쟁/비교의 문화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부터 현재의 코로나19 팬데믹까지 훑어 내려오며 동아시아 쌀 경작 문화권에서 발전한 제도들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위계와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형성했는지 흥미진진하게 써내려간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차별, 학벌주의, 연공서열과 여성 배제의 구조, 부동산 문제 등 현대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벼농사 체제의 유산들과 맞닿아 있다는 주장이다.
▶“BTS·K방역 성공, 청년실업·부동산 문제…모두 ‘쌀문화’의 유산이죠”
■세습 중산층 사회 | 조귀동
한국 사회 불평등에 대한 분석으로 주목받은 또다른 책이다. <세습 중산층 사회>에선 청년 세대 ‘내부’의 격차를 추적한다. 이를테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입시 및 장학금 의혹과 관련해 가장 크게 분노를 표출한 집단은 ‘명문대’에 재학 중인 중산층 가정의 20대였다. 반면 명문대 바깥에 자리한 20대 대다수는 ‘남의 일’이라는 무기력한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양분화는 그들이 경험하는 불평등의 양적·질적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책은 말한다. 오늘날 20대는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생활세계에 놓였으며, 이전 세대와는 다른 복합적인 불평등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불평등 구조의 위계 서열에서 자리하는 위치는, 그들 부모가 어떤 계층 또는 계급에 속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날 20대가 경험하는 불평등의 본질은 학력과 노동시장의 지위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50대 부모 세대가 교육 투자뿐만 아니라 문화적 역량, 사회적 네트워크 등 무형 자산을 이용해서 그들의 자녀에게도 동일한 학력과 노동시장 지위를 물려주는 데 있다. 입시, 취업, 결혼, 부동산 등 ‘세습 중산층 사회’에 산재한 다중적 불평등 문제를 들여다본다.
▶[흑백 민주주의④]출발선만 같으면 된다? ‘각자도생’ 사회의 이상한 ‘공정’
공정과 불평등은 계급과 대물림의 문제만이 아니다.
<재난 불평등>(존 머터)은 재해가 단순한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책이다. 저자는 재앙이 낳는 ‘불평등의 민낯’을 포착한다. 왜 재난 사망자의 다수가 빈민층인지, 그리고 재난 발생 당시와 그 전후의 극복 과정에서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재난에 투영되고 답습되는 이유를 찾아 나간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질병이 사회 불평등 문제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한 통찰이 다시 주목받았다.
▶[코로나19와 삶]김승섭 “누가 더 아픈지, 누가 더 희생되는지 물어야”
<가난의 문법>(소준철)은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여성 도시 노인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회 가난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45년생 윤영자’라는 가상의 여성 노인을 통해 가난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것이 개인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본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서사에 통계자료와 각주를 더해 질적 연구에 입각한 사회과학 연구서를 떠올리게 했다면, <가난의 문법>은 사회과학 연구에 서사를 병치해 도시 말단의 ‘가난’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책과 삶]우연한 가난은 없다 ‘45년생 윤영자’
<보이지 않는 여자들>(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은 데이터 공백이 여성들을 체계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을 노동, 도시계획, 과학, 정치, 경제 등 전 영역에 걸쳐 살핀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여름철 냉방이 되는 사무실에서 담요를 덮고 있고, 자동차 충돌 사고에서 사망 위험이 더 높으며, 특정 약물에서 부작용을 경험하기도 한다. 모두 기준을 남성 중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남녀 모두를 이롭게 하는 젠더 공백 메우기를 제안한다.
▶[책과 삶]‘젠더 데이터’ 없이 설계된 ‘남성 표준’ 세상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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