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서울·부산시장의 사임 이유
역대 가장 조용한 선거가 다가온다. 2021년 4월7일 재보궐선거다. 재보선에 대한 낮은 주목도, 정치 싫증, 선거 피로, ‘회전문 후보자’의 식상함에 코로나19 속 ‘대화 실종’까지 더해진 결과다.
당분간은 가족·친구와 모일 수 없으니, ‘정치 대목’이라는 설 명절에도 조용한 선거 분위기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선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감정 상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지만, 여론 형성과 시민 대표 선출이라는 선거의 효능을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이번 설에는 만날 수 있는 몇 명하고라도 선거 이야기를 마구 나눠보자. 풍성한 ‘대화’ 상차림을 위해 명절에 만날 수 없는 가족과 친구의 마음을 <한겨레21>이 먼저 들었다. 새로 시장을 뽑는 서울과 부산에서 유권자들을 만났다. 다양한 갈래의 이야기를 모으니, 유권자의 마음이 2021년 재보선을 넘어 2022년 대선에서 어디로 향할지 어렴풋이 보이는 듯도 하다._편집자 주
2021년 4월 치르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젠더 이슈가 선거의 주요 축이 되는 이른바 ‘젠더 선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일찌감치 나왔다. 두 지역 선거 모두 전임 시장의 권력형 성범죄에서 촉발됐기 때문이다. 1월25일 정의당에서도 김종철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이 발생하고, 같은 날 국가인권위원회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을 두고 “성희롱 행위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낸 점도 이번 선거에서 젠더 이슈 주목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여성 후보가 상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란 분석이 잇따르다보니, 사상 처음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이 탄생할 수 있을지에도 기대감이 쏠린다.
최초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탄생?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높은 관심에 견줘 “공허하다”는 평이 뒤따른다. 최근 떠오른 부동산이나 개발 이슈에 밀려 성폭력·성차별 근절 등 젠더 이슈는 상대적으로 힘이 빠졌다는 진단이다. 특히 여권 후보들은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거란 우려에 권력형 성범죄를 직접 언급하는 일이 드물다. 언론 인터뷰에서 질문이 나올 때야 “민주당이 상처받은 분에게 사과해야 할 방법이 있으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거나 “죄송하다. 하지만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여당 후보가 시장이 돼야 한다”(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고 답변하는 식이다. 출마 선언을 하면서 전임 시장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사과한 후보는 상대적으로 험지에 출마하는 김영춘 전 국회 사무총장이 유일하다. 그는 1월12일 부산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이번 보궐선거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장의 잘못 때문에 생겼다. 오거돈 전 시장을 대신해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는 입장을 밝히고, 성평등정책관 제도나 여성의회 신설 공약을 내놨다.
국민의힘 등 야권은 “서울시 고위공직자 전담 성범죄 신고센터, 평등고용기회위원회, 성폭력 대책 전담 사무실 설치”(나경원 전 의원)나 “서울시인권센터 설립, 서울시 공무원 성범죄 ‘원스트라이크 아웃’ 제도 도입”(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 관련 정책을 내놓고 있다. 서울시장 예비후보인 오신환 전 국민의힘 의원은 유일하게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의 완전 복직”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권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진정성을 내비치기보다 지지율 획득을 위해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 성범죄 사건을 활용하는 것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특히 국민의힘은 대정부질문에서 민주당에 “성폭력 프레임을 씌우라”는 전략을 세워 논란이 일었다.
적극적으로 성폭력·성차별 근절 정책을 전면에 내놓은 이는 신지혜 기본소득당 후보다. 그는 권력형 성폭력 방지 대책뿐 아니라 “디지털성범죄 영상 삭제 지원 조례와 생활동반자조례 제정, 보건소에 사후피임약·미프진 상시 구비 등 재생산 권리 보장” 등 다채로운 성평등 공약을 밝혔다. 신지혜 후보는 “낡은 선거 구도, 해묵은 의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중요한 시점”이라며 “특히 밀레니얼세대에게 성평등은 내 삶에 당연히 자리잡아야 하는 삶의 새로운 기준이기 때문에 ‘성평등한 서울’을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출마 의사를 밝혔던 권수정 서울시의원(정의당)도 “공적 돌봄노동 재구성, 젠더정책국 신설, 꾸밈노동 폐지 지원” 등의 공약을 내놨으나 정의당은 ‘김종철 사태’로 2월3일 서울·부산시장 선거에 후보를 공천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젠더 이슈에 높은 관심을 보인 유권자는 거대 양당이 모두 “미덥지 않다”고 말한다. 사건 발생 6개월이 넘어서야 피해자에게 처음 사과한 민주당이나, 관련 이슈를 정쟁 수단으로 이용하는 국민의힘이나 “마음에 안 드는 건 매한가지”란 얘기다. 직장인 신연희(29·가명)씨는 “민주당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후보를 안 내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국민의힘을 뽑을 순 없다”고 말했다.
“여성 후보라고 젠더 의식 있는진 의문”
이들은 단지 후보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해당 후보에게 젠더 감수성이 존재할 것이라고 연결 짓는 분위기도 경계했다. 신씨는 “(야권에 마땅한 인물이 없어) 박영선 후보를 뽑는다 해도 솔직히 박 후보가 젠더 의식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솔아(32·가명)씨도 “여성 시장이 좋지만 몸만 여성인 사람이 당선된다면 딱히 나을 것도 없어 보인다”며 “김종철 전 대표 사건 때 정의당이 피해자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잘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관해) 그 정도 수준의 성인지 감수성이 체화되지 않은 여성이라면 여성 후보라고 해도 ‘여성’인 점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보궐선거를 치르게 된 원인을 짚고 성찰하는 과정이 삭제된 채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두 사건 모두에서 권력 오남용을 묵인하고 은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지방자치단체 내부에 존재했기에, 후속 대책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서울시장 사건에선 (시청에서) 조직적인 2차 가해가 발생했다. 내부 시스템을 어떻게 정비할지 비전을 먼저 밝혀야 이번 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도전할 만한 ‘감’이 되는 사람”이라며 “성폭력·성차별 문제는 2030 여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슈로까지 발전했는데 그 점에 대한 (서울시장 후보들의) 인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역시 “시장이 가진 (절대화된) 권력, 시장이 채용한 별정직 공무원을 통해 남성화된 카르텔이 작동하는 정치 구조, 성인지 감수성을 별것 아닌 거로 보는 정치 문화 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관심을 두는 정치인이 없다”고 꼬집었다.
“피해자 중심주의 실현할 기회”
박영선, 나경원 등 여성 후보가 앞다퉈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따뜻하고 포근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것도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비판받는 대목이다. 여성의 리더십을 가정 내 ‘엄마’ 역할에 국한하며 여성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여성의 역할을 사적인 영역에 한정 짓는다는 점에서 성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젠더 이슈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정치의 역할을 묻는 바로미터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감이 있다. 그럼에도 주요 후보자들이 젠더 이슈와 관련해 기대에 못 미치는 의견이나 공약을 내놓고 있다. 이대호(31)씨는 “이번 선거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일상을 돌려주는 방법’에 대한 모범 사례를 만들 기회임을 많은 후보가 생각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냈다. 서울시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한 이씨는 “(성범죄) 피해자가 (서울시에) 복귀하면 불필요한 관심, 편견, 업무 공백으로 인한 적응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직원의 회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울시장) 후보가 당선되면 이 과정이 더 수월할 것”이라며 “이는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선거를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를 실현할 기회”라고 말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표지이야기 - 4.7 민심 르포 연결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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