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양반 오희문의 비범한 난중일기 '쇄미록'을 읽다

김석 2021. 2.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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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조선 중기를 살다간 한 평범한 양반이 있습니다. 이름은 오희문(吳希文, 1539~1613). 해주 오씨의 13대손으로 연안 이씨와 혼인했고, 평생 과거시험이나 벼슬과는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죠. 말 그대로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희문은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았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 덕분입니다.

《쇄미록(瑣尾錄)》(보물 제1096호)


《쇄미록(瑣尾錄)》. 오희문이 자기 일기에 붙인 제목입니다. '보잘 것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죠. 오희문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고 난 뒤 1601년 2월 27일까지 장장 9년 3개월, 3,368일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현재 전하는 필사본은 총 7책, 1,670쪽, 51만 9,973자입니다. 사료적 가치가 커 1991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됐죠.

그리고 마침내 2018년에 역주본이 전 8권으로 출간됩니다. 사료의 가치를 생각하면 늦은 감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도 아닌 일반 독자가 이 방대한 일기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죠. 마침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오희문의 일기를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가 열리고, 얼마 전엔 한국사학자 신병주 교수의 해설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이 출간됐습니다.

오희문 지음, 신병주 해설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오희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도, 전쟁을 직접 목격한 적도 없습니다. 오희문의 일기는 피란 생활의 기록이죠. 전방이 아닌 후방의 기록입니다. 끝없는 피란 과정 속에서도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고, 살 집이 필요했으며,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내고, 자식들 결혼도 시켜야 했습니다.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 7년을 질질 끈 전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조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죠. 평범한 양반이었던 오희문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전쟁은 칼 휘두르고 총 쏘는 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오희문의 일기는 똑똑하게 보여줍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증언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은 읽는 내내 가슴을 때리죠.

어제 오는 길에 7, 8세 되는 아이가 큰소리로 통곡하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감싸고 슬피 우는 것을 보았다. 괴이해서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남편이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밥을 구걸했는데 이제는 구걸해도 얻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기에,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 우리도 장차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니, 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애통함과 측은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 1593년 7월 15일

새벽에 출발했다. 몇 리 못 가서 울타리 밑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어미를 부르며 슬퍼했다. 이웃 사람에게 물었더니, 어제저녁에 그 어미가 버리고 갔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자애로운 하늘은 지각없는 짐승조차 쓸어 없애지 않건만, 가장 지혜롭다는 인간을 이처럼 극단으로 내모는가. 극단에 내몰리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크게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 1594년 1월 23일

인륜마저도 저버리게 한 끔찍한 배고픔은 전쟁이 불러온 가장 큰 후유증이었을 겁니다. 극한에 내몰린 인간이 스스로 인간성을 저버리는 현실, 그리고 배고픔을 끝내 견디지 못한 이들의 덧없는 죽음들….

길에서 거적에 덮인, 굶어 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어 물었더니 제 어미라고 한다. 병들고 굶주리다 어제 죽었는데, 그 시신을 묻으려고 해도 제힘으로 옮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땅을 팔 연장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잠시 후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갔는데, 두 아이가 하는 말이 저 호미를 빌린다면 땅을 파서 묻을 수 있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 1594년 2월 14일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육촌의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항상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듣자니, 전에는 한양 근처에서 쌀이라도 한두 되 가진 사람이라야 죽이고 빼앗더니 최근에는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서 죽여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 - 1594년 4월 3일

전쟁이 한창일 때는 이런 끔찍한 현실을 목격해야 했던 오희문과 가족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또 다른 재난이 있었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병마였습니다. 오희문 자신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학질과 종기 등에 끝없이 시달립니다. 그 와중에 오희문 부부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죠. 막내딸 단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희문의 일기를 보면 먼저 보낸 딸을 그리워하며 애통해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전시코너 ‘그림으로 보는 쇄미록’


집집마다 쥐와 벼룩과 이가 창궐하고 굶주린 호랑이까지 수시로 출몰했던, 지금으로선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삶의 질곡들을 오희문은 낱낱이 적었습니다. 지독하리만치 성실한 기록이죠. 이리저리 피란을 다니면서도 1년 내내 돌아오는 수많은 제사를 거르지 않으려 애쓰고, 심지어 공이 있는 노비들의 제사까지 지내주었다는 기록을 읽노라면, 전통 시대에 '제사'라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시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죠.

[연관기사] 왜적의 칼에 딸을 잃은 시골 선비의 임진왜란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20825

《쇄미록(瑣尾錄)》은 비슷한 시기에 경남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시골 선비 정경운(鄭慶雲, 1556~?)의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과 더불어 평범한 양반이 쓴 비범한 기록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귀중한 기록들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후손들을 통해 대대로, 무사히 전해진 사실 자체가 진한 감동을 주죠.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전해져 더 깊은 감동을 얻게 됩니다. 무려 9년 3개월 동안 이어진 오희문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후로는 종이도 다 되어 그만 쓰기로 했다. 또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오창 화백이 2020년에 복원한 〈오희문 초상〉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 소장)

김석 기자 (stone2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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