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男도 울고 싶다" T.T 존을 아시나요[박성민의 더블케어]

박성민기자 2021. 2. 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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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텔레마케터로 일하던 이정민 씨(가명·26·여)는 지난해 근무 9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뒀다. 전화기 너머로 고객을 응대할 때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압적인 상사와의 갈등도 버거웠다. 병원에선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이 씨는 “화나고 힘들어도 속으로 삭이기만 했지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 씨를 깊은 우울의 터널에서 꺼내 준 건 ‘눈물’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이하 센터)에서 상담을 받으며 ‘잘 우는 법’을 배웠다. 이곳엔 남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 ‘T.T ZONE(티티존)’이 있다. 마음을 적시는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곳이다.

이 씨는 “졸업하는 딸이 ‘엄마도 이제 엄마의 삶을 살아’라고 말하는 ‘엄마 졸업식’ 영상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며 “실컷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티티존을 다녀간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 화성=박성민 기자 min@donga.com

● 눈물에 인색한 중년男 “나도 울고 싶다”

티티존은 2019년 9월 문을 열었다. 그해 방문자는 205명. 지난해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상반기엔 문을 닫았다. 하반기엔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드문드문 운영했는데도 167명이 방문했다. 티티존을 포함한 시민정신건강체험관 운영을 총괄하는 최소라 팀장은 “슬픔이나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이 강한데 이런 감정을 건강하게 풀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티티존을 제안한 이는 흔히 눈물에 인색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중년 남성이다. 2018년 화성시가 정책공모전을 열었는데 “중년 남성도 마음껏 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아이디어를 냈다.

화성시가 정신건강 서비스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뭘까. 최 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동탄 신도시 조성으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정신건강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젊은 층뿐 아니라 노후를 준비하는 은퇴족도 많다. 이주민들은 전학, 이사, 이직 등 모든 게 스트레스다. 하지만 각종 편의 시설에 비해 의료, 복지 인프라는 충분하지 못하다.”

실제로 화성시에서 정신건강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은 16곳으로 인구(약 86만 명) 규모에 비하면 넉넉지 않은 편이다.

티티존은 침실이나 호텔방처럼 아늑한 분위기다. 푹신한 소파와 은은한 조명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준다. 화성=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방문객에겐 연령, 고민 상담 내용 등에 따라 맞춤형 영상을 보여준다. 최대 50분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심리적 동요가 큰 방문자들을 고려해 안전장치도 마련해뒀다. 세면대엔 깨지지 않는 거울을 걸었고, 전원 케이블은 최대한 보이지 않게 숨겼다. 비상벨을 설치해 응급 상황이 발생하면 구급차를 바로 호출할 수 있도록 했다.
메모리존을 찾은 방문객들은 주로 떠난 이에게 편지를 쓰거나 애도, 상실에 대한 책을 읽는다. 화성=박성민 기자 min@donga.com
티티존 반대쪽에는 ‘메모리 존’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 등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의 발길이 머무는 애도의 공간이다. 떠난 가족이 생각나 유품을 집에 둘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유족들이 유품을 잠시 보관하기도 한다. 매달 마지막 금요일에는 자살 유가족 모임도 갖는다.

● ‘코로나 블루’, 우울증 100만 명 시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1993년 문을 연 ‘아워하우스(OURHOUSE)’라는 단체가 있다. 이곳은 스스로를 슬픔지원센터(Grief Support Center)라고 소개한다. 슬픔을 자연스러움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주위와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티티존과 유사한 ‘눈물의 방’도 운영한다.

일본의 민간단체인 루이카츠(淚活·눈물 활동)는 함께 모여 눈물을 흘리는 행사를 연다. 한 번에 10명가량이 모여 슬픈 영상을 보거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해소한다. 눈물 소믈리에, 눈물 치료사 등의 직업도 생겼다. 그만큼 눈물의 치유 효과에 공감하는 이가 많다는 의미다.

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눈물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다만 사람 몸에 혈액 순환이 중요한 것처럼 감정도 자연스럽게 표출돼야 건강하다는 게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배승민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중년 이상의 남성들은 특히 감정을 적절히 표출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라며 “티티존을 찾는 시민들이 많다는 건 슬픔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공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국민도 늘었다. 지난해 12월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설문조사(2063명)에서 응답자의 20%가 우울위험군으로 조사됐다. 2018년 지역사회건강조사(3.8%)의 5배에 이른다. 2019년 79만 명이던 우울증 진료 인원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60만 명에 육박했다. 연간 진료 인원은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국의 정신건강복지센터는 200곳이 넘는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문턱이 높다. 우울감이나 정신건강 문제를 솔직히 터놓은 걸 꺼리는 분위기 때문이다. 이해우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장은 “본인의 감정 상태나 스트레스 변화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되도록 빨리 외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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