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일본 M&A 사상 최대..키워드는 기업재편·적대적M&A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선택과 집중' 나선 기업의 사업부 매각 11년만에 최다
코로나 이후 기업환경 변화로 日 경영인, 싸움꾼 변신
日투자 PE 자금 6000억엔 넘어 사상 최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세계적으로 확산한 지난해 일본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인수·합병(M&A)이 성사됐다. 2020년 한해 동안 일본 M&A 시장을 관통한 화두는 기업재편과 적대적 M&A, 사모펀드(PEF) 운용사였다.
금융정보회사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기업과 관련한 M&A는 4305건으로 2018년(3943건)을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2019년보다는 9.7% 늘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M&A가 성사된 건 수요와 공급이 모두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채산성 떨어진 모태사업도 과감히 성리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을 중심으로 생존을 위한 매각을 결정한 기업이 속출한 한편 코로나 특수를 누리면서 사업확장에 나선 기업도 증가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금융완화에 힘입어 두둑한 실탄을 확보한 PEF들이 가세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M&A가 벌어졌다.
하라다 사토시 닛세이기초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요미우리신문에 "코로나19로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엇갈리면서 M&A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선택과 집중'에 나선 기업의 움직임이 특히 두드러진 한 해 였다. M&A 자문사 레코프에 따르면 지난해 상장기업의 기업 및 사업부 매각은 399건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11년만에 가장 많았다. 코로나19의 확산과 디지털화의 진전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이 사업재편의 수단으로 M&A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분석이다.
제조업체들을 중심으로 비핵심 사업부문을 매각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건축자재 기업인 릭실그룹은 홈센터(생활용품·인테리어 전문 대형마트) 자회사 릭실비바와 커텐 제작사인 이탈리아 페르마스티리자를 매각했다. 본업인 건자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세토 킨야 릭실그룹 사장은 "애셋라이트(자산이 가벼운)한 회사가 되겠다"고 설명했다.
다이도그룹홀딩스는 작년 10월 채무초과에 빠진 말레이시아 음료 자회사를 싱가포르기업에 팔았다. 사노야스홀딩스는 11월 모태기업인 조선사업을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및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린데다 코로나19 여파로 사업을 지속하기 곤란하다고 판단하자 모태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12월에는 세가사미홀딩스가 코로나19 여파로 가동률이 낮아진 게임센터 운영 자회사 지분 85%를 처분했다.
자금조달을 은행에 의존하는 일본 기업은 미국이나 유럽 기업에 비해 사업부 매각 등 기업재편에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원리금을 안정적으로 갚으려면 사업을 다각화해 위험을 분산하는 편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바뀐 건 2015년 상장사의 사외이사 제도를 강화한 기업지배구조 지침이 제정되면서부터라는 평가다. 자본효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기업들이 비핵심사업부 정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투자자본이익률(ROIC)과 같은 자본효율을 나타내는 경영지표를 통해 사업별 채산성을 관리하고, 채산성이 낮은 사업을 매각해 채산성이 높은 기업에 투자하는 경영활동이 활발해졌다는 분석이다. 요시토미 유코 레코프데이터 사장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는 실적 압박에 따른 사업매각이 많았지만 지난해에는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과감한 투자도 주저하지 않았다. NEC는 스위스 대형 금융 소프트웨어 업체를 2400억엔에 인수했다. NEC 사상 최대 규모의 M&A였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디지털분야는 대기업도 노하우 축적과 인재 육성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M&A를 활용해시간과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익 위해서라면 '진흙탕 싸움'도 불사
신속한 의사결정과 소수주주 보호를 목적으로 모자회사 동시 상장을 해소하는 사례도 늘었다. 일본 최대 이동통신회사 NTT도코모와 편의점 체인 패밀리마트, 소니파이낸셜홀딩스 등이 모회사인 NTT와 이토추상사, 소니의 주식공개매수를 거쳐 상장폐지됐다.
NTT가 NTT도코모를 100% 자회사로 만드는데는 일본 공개매수 사상 최대 규모인 4조2578억엔이 투입됐다.
한 개의 기업을 놓고 복수의 기업이 쟁탈전을 벌이거나 적대적 M&A를 서슴지 않았던 것도 지난해 일본 시장에서 눈에 띄었던 변화다. 적대적 M&A를 도둑질 취급하는 일본 재계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라는 설명이다.
일본 7위 홈센터업체 시마추를 놓고 2위 DCM홀딩스와 일본 최대 가구전문업체 니토리홀딩스가 벌인 쟁탈전은 일본 M&A 시장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10월 DCM홀딩스는 시마추를 인수하기로 합의하고 주식 공개매수에 나섰지만 한 달 뒤 니토리가 30% 높은 가격을 제시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DCM의 공개매수에 동의했던 시마추 경영진이 니토리의 품에 안기기로 입장을 바꾸면서 결과가 뒤바뀌었다.
시마추 쟁탈전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진흙탕 싸움도 불사하는 일본 경영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란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기업환경이 크게 바뀌면서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기감이 경영인들을 싸움꾼으로 변신시켰다는 분석이다.
외식 대기업 코로와이드는 정식 체인 오토야홀딩스에 대한 적대적 M&A에 성공했다. M&A는 기업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극히 보통의 수단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업계의 금기가 깨졌다.
◇PE 거래규모 10년새 7.4배
지난해 일본 M&A 시장의 메인 플레이어는 PEF였다. 블랙스톤이 다케다제약의 대중의약품 사업부를 2420억엔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사업재편에 나선 기업의 파트너로 PEF가 나선 거래가 속출했다.
베인캐피털은 미쓰이E&S홀딩스로부터 쇼와비행기공업을 455억엔에 인수했다. 올해 들어서는 영국 CVC가 시세이도의 일상용품 브랜드인 쓰바키를 인수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
PEF가 일본 기업 및 사업부를 인수한 규모는 2009년 600억엔에서 지난해 4400억엔으로 10여년새 7.4배 늘었다. 넘치는 유동성에 힘입어 PEF들이 잇따라 대규모 펀드를 조성한 덕분이다.
영국 금융정보업체 프레킨에 따르면 일본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설립된 펀드자금은 작년 11월말로 6000억엔을 넘었다. 2017년 5700억엔을 넘어 사상 최대규모가 될 것이 확실시된다. 칼라일은 일본에 투자하는 펀드로는 사상 최대인 2580억엔 규모의 펀드를 새로 만들었다. 일본계 PE인 폴라리스캐피털과 인테그럴도 종전의 두배가 넘는 1500억엔과 1238억엔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일본 정부도 정책적으로 M&A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 세제를 개편해 피인수기업의 주주가 회사를 매각하는 대가로 인수기업의 주식을 받으면 과세를 늦춰주기로 했다. 미국과 유럽처럼 자사주를 활용한 M&A가 쉬워져 기업재편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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