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병 대신 세 손가락·변기솔.. MZ세대가 독재에 맞서는 법
'전 남친이 나쁘긴 해도 미얀마 군부가 훨씬 더 나쁘다.'
'내게 독재는 필요 없다. 남자친구만 원할 뿐.'
최근 미얀마에서 최대 도시 양곤을 중심으로 확산 중인 군부 쿠데타 항의 시위대가 들고나온 손 팻말에 적힌 문구들이다. 이전의 반정부 시위와 달리 MZ세대(1980년대 초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2000년대 초에 태어난 Z세대를 통칭하는 말)가 중심이 된 이번 시위에선 이처럼 재치 있는 시위 구호가 종종 눈에 띈다.
구호뿐 아니라 '세 손가락 경례'와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나타내는 빨간 리본도 이번 시위의 상징이다.
영국 BBC 방송은 9일(현지시간) "인터넷 접근이 쉽고 서구문화·온라인 합성 사진인 '밈(meme)'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전보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시위대가 유머를 가미한 민주화 메시지 팻말을 흔들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젊은층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남다른 상징물을 활용하는 것은 비단 미얀마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러시아 반정부 시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비밀 궁전'을 풍자하는 변기 청소용 솔이 저항의 상징으로 쓰인다. 지난해 태국의 반정부 시위에는 노란색 고무오리 캐릭터 '러버덕'이 등장했다.
MZ세대가 주도하는 시위의 언어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①해리 포터·헝거 게임… 저항은 대중문화와 함께 온다
MZ세대의 시위는 대중문화를 정치적 상징으로 삼는다.
태국 반정부 시위에 이어 이번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도 등장한 세 손가락 경례는 영화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2012)에서 빌려 왔다. 독재국가 '판엠' 시민들이 슬픔과 분노를 표하는 모습에서 따와 세 손가락은 자유·선거·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곤 한다.
2014년 태국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 당시 군부에 항의하는 표시로 쓰였고, 지난해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도 이 제스처가 다시 한번 등장했다.
미얀마 시위대 역시 이웃국가 태국 반정부 시위에서 널리 사용된 세 손가락 경례를 하며 구호를 외치고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이들은 거리뿐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도 세 손가락 경례 사진이나 그림을 퍼트리고 있다.
지난해 태국 반정부 시위대 중 일부는 영화 '해리 포터' 속 마법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마법사'로 칭하기도 했다. 또 정부의 혈세 낭비를 꼬집으면서 일본 만화영화 캐릭터인 '햄토리'를 동원했다. '해바라기씨가 가장 맛있어'라는 햄토리의 노래를 '납세자의 세금이 가장 맛있어'라고 바꿔 부르는 식이다.
아르진 통유공 태국 탐마삿대 교수는 태국 매체 플러스세븐에 "젊은층은 이 같은 무형의 메시지를 통해 정치가 나쁜 것이 아니며 모든 일상이 정치와 연관돼 있음을 알리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②억압에서 탄생한 창조성
최근 러시아는 곳곳이 연일 벌어지는 반정부 시위로 혼란스럽다. 러시아 당국이 이번 시위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고 평가 절하하는 것과 달리 전문가들은 이번에 거리로 나선 대중의 분노가 과거와는 다른 시위 양상을 보일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특히 이번 시위는 억압이 시위대의 창의력을 키운 사례다. AFP통신은 "나발니의 체포가 도화선이 된 이번 시위는 창의성을 보여 왔다"고 전했다.
이번 러시아 반정부 시위의 상징은 변기솔과 파란색 남성 사각팬티다. 나발니가 지난달 19일 푸틴의 '비밀 궁전'이라며 공개한 영상에서 700유로(약 95만원)짜리 황금 변기 청소용 솔 정보까지 폭로해 시위대가 푸틴의 호화 생활을 풍자하는 의미로 변기솔을 들고 나선 것이다.
나발니가 지난해 독극물 테러를 당할 때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들이 자신의 파란색 사각팬티 안에 독극물 노비촉을 묻혀 놓았다고 이야기한 데 착안해 사각팬티도 동원됐다.
지난해 태국 반정부 시위 현장에 러버덕 모양의 고무보트가 등장한 것도 경찰 진압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당시 시위대는 러버덕 고무보트를 경찰 물대포 방어용으로 동원했다. 노란색이 태국 왕실 상징색이라는 점과 맞물려 태국 시위의 상징이 됐다.
③밈(meme), 장벽 깨는 도구
MZ세대가 주도하는 최근 시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지속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국제적 관심을 유도하는 게 특징이다.
독특한 각국 시위 현장의 상징은 밈으로 재탄생해 SNS를 통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간다.
최근 트위터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황금색 변기솔을 연결시킨 다양한 밈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게 대표적 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미얀마 군부가 자국 내 페이스북과 트위터 접속 제한에 이어 인터넷과 와이파이망까지 끊은 것도 이 때문이다. 미얀마 시민들은 가상사설망(VPN)을 우회해 페이스북에 접속해 국제 사회의 연대를 촉구했다.
또 러시아에서는 나발니가 폭로한 푸틴 대통령의 '비밀 궁전' 영상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 수없이 공유되자 당국이 이들 플랫폼 업체들 압박에 나섰다.
미얀마인들이 페이스북·트위터·인스타그램에 '세이브 미얀마(#SaveMyanmar)', '미얀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Myanmar_wants_Democracy)' 등의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을 퍼트리며 도움을 호소하고, '미얀마의 목소리를 들어달라(#HearTheVoiceOfMyanmar)', '선거 결과를 존중해달라(#RespectOurVotes)', '시민불복종운동(#CivilDisobedienceMovement)' 등으로 해시태그를 꾸준히 늘려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태국의 반정부 시위 당시 에임 신펭 호주 시드니대 교수는 호주 ABC방송에 "시위에 참여 중인 태국인들은 고도로 세계화된 세계에서 자랐다"며 "때문에 자신들의 이미지를 굳이 서구 문화권에 호소하려 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들이 등장한 사진은 해외에서 (시위 상황을) 관심 가지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진단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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