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 '남한엔 쾌거, 북한엔 패착?'
[경향신문]
“올해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이 국제사회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남북은 손잡고 함께 증명해야 합니다.”
지난달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발표한 신년사의 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남북, 북·미 대화 복원 의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올해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이 되는 해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경색된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지만, 남북이 함께 기념할 계기로 유엔 가입 30주년에 주목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남과 북이 유엔 가입 문제를 놓고 수십년 가까이 벌인 ‘기싸움’을 기억하는 이라면 필연적으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북한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의미를 부여할까. 만약 남측이 유엔 동시 가입일(9월17일)을 공동 기념하자고 정식으로 제안한다면 북한은 화답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30여년 전, 남북이 벌인 ‘막후 외교전’에서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이뤄지기까지
1948년 남북이 각각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한 이후부터 남북한은 유엔 가입 성사에 매달렸다. 국제사회 일원으로 인정받고, 상대와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1949년 1월19일 한국은 유엔 가입 신청서를 처음으로 제출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 표결 결과 찬성 9표, 반대 2표가 나왔지만,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유엔 총회에까지 한국의 가입안이 상정되기도 했지만, 번번이 소련 등의 비토로 좌절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6·23 선언에서 남북한 동시 가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북한은 ‘유엔 동시 가입은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획책’이라는 논리로 ‘고려연방공화국’이라는 국호로 단일 의석으로 가입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은 1980년대에도 주요국을 상대로 유엔 가입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 집권 이후 전개한 북방외교, 공산권 국가들의 올림픽게임 참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했다.
특히 한국의 유엔 가입 노력이 급물살을 탄 것은 1990년.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이듬해 9월30일에는 소련과 수교했고, 10월20일에는 중국과 무역대표부 상호 교환에 합의했다. 그 해 가을 제45차 유엔 총회에서는 71개국이 한국의 유엔 가입에 적극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단일 의석 가입안에는 아무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 국가들이었던 나라들이 잇따라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상황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91년 4월 방한한 미하일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한국의 유엔 가입에 대한 이해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중국도 북한에 동시 가입 문제를 수용할 것을 설득하고 나섰다.
결국 북한은 1991년 7월8일 유엔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게 된다. 한국도 8월5일 유엔 가입 신청서를 냈다. 마침내 1991년 9월17일, 제46차 유엔 총회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안을 159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참고자료: 외교안보연구원, <한국외교 60년>, 2009년.
■북한에게는 ‘뼈아픈’ 외교적 패배로 기록된 사건
북한은 1991년 5월27일 외무성 성명을 내고 유엔 가입 결정을 공표한다. 남측을 견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성명에서 일부를 옮겨왔다.
“남조선당국자들이 기어이 유엔에 단독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는 조건에서 이것을 그대로 방임해 둔다면 유엔무대에서 전조선민족의 이익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들이 편견적으로 논의될 수 있고, 그로부터 엄중한 후과가 초래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남조선당국자들에 의하여 조성된 이러한 일시적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로서 유엔에 가입하는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북한에게 유엔 동시 가입 결정은 미·일·중·소 등 한반도 주변 4국에 의한 남북한 ‘교차 승인’이 좌절되고, 국제사회 여론이 한국에 완전히 기운 상황에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길이었다. 냉전 질서 해체라는 세계질서 변동기에 한국은 소련과 동구권, 중국과 활발하게 수교를 맺으며 도약했지만, 북한은 미국·일본과 관계정상화를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남북 간 외교적 불균형이 커진 것이다. 북한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동의한 것도 ‘수세적 체제생존’ 목적이 컸다는 분석도 있다(김갑식(2011),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한 북한의 입장’)
실제로 북한 외교관을 지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5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문제는 “북한이 제일 싫어하는 문제”라며 “이를 ‘남북 공동 이벤트’로 만들려 하는 것은 북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김정은의 뒤통수를 교묘하게 치려는 전략적 계산인가”라고 반문했다.
유엔 동시 가입 이후 북한은 체제보장 수단으로서의 핵무력 확보에 더욱 강한 집념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북한은 1960년대부터 영변 핵 단지를 조성하며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다. 하지만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핵개발의 기폭제가 된 것은 아닐까.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5년 저서 <외교의 시대>(미지북스)에서 ‘가정적 상황(what if)’을 상정해 던진 질문들은 생각해 볼 지점을 제공한다.
“냉전 이후 북한에 외교적 불균형의 족쇄를 채워 놓은 것이 과연 바람직했을까? 체제 안보에 관하여 심각한 위기의식에 몰린 북한에 대해 외교적으로 풀어주면서 서방과의 연결고리를 단단히 만들어놓고, 그 다음 문제의 핵 개발에 대해서는 강하게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면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나 안보적으로나 취약할 대로 취약해진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채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에게 핵 개발을 통한 현상 타파의 동기만 강하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따로, 언젠가는 같이?
유엔에서의 한국의 위상은 지난 30년 사이 눈부시게 달라졌다. 한국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에 걸맞게 유엔에 내는 분담금 규모에서도 1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여러 유엔 무대에서 벌어지는 국제적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외교력이 불과 한 세대 만에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배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2회 진출, 경제사회위원회(ECOSOC) 의장 선출 등 의미있는 족적을 많이 남겼고, 유엔에서의 기여를 확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외교부는 2021년 주요업무 추진계획에서 “유엔 가입 30주년을 맞아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2024~2025년 임기) 추진 등 다자협력 활동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북한의 유엔 외교는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때로는 기후변화나 지속가능발전목표(SDG) 관련 논의에서 보조를 맞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제재를 비판하거나 인권 관련 문제제기를 반박하는 ‘수동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의 역사, 그리고 현재 남북의 위상 차이를 고려할 때 남북이 함께 유엔 동시 가입 30주년을 기념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특히 지금의 단절된 남북관계 상황에서는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남북관계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측면은 부인할 수 없다. 한반도 문제와 유엔 사정에 밝은 외교소식통은 “유엔 동시 가입으로 국제 무대에서의 소모적인 남북 간 대치와 경쟁 외교가 종식됐다”며 “특히 북한에 대해 국제사회와 미래 관계 설정 방향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됐다”고 짚었다.
다만 유엔 가입이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한의 평화공존, 통일 여건의 조성 등에 중대한 전기를 제공했다”(통일부 북한정보포털)는 설명이 정말로 힘을 얻으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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