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70년기획]⑬ "하늘나라에 가서나마 효도하고 싶습니다"

지선호 2021. 2. 1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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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줄 알았지만,
여전히 재회하지 못한 이산가족이 5만 명이 넘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기대도, 시간도 하루하루 희미해져 가는데요.
설을 맞아 그분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장차 통일되면 돌아오라"던 아버지의 당부, 70여 년이 지났습니다.

김원진(93세) 할아버지는 북한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혈기 넘치는 20대 청년이었습니다.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남한에 가겠다"는 아들의 결심을,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지지해주셨습니다.

"장차 훌륭한 사람이 돼 통일되면 고향에 돌아오라."

하지만 아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한사코 월남을 반대했던 어머니는 끝끝내 울음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우시느라 아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조차 못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출발할 때 집 안에서 나오질 못했어요, 우시느라고. 대문 밖까지 나오도록 우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리더라고요…."


■속옷만 입은 채로 헤엄쳐 월남…"6·25전쟁 때 죽을 고비도 넘겼지요."

청년 김원진이 남한 땅을 밟은 건 1949년 9월 13일. 자정쯤 임진강에 도착하니 물은 불어나고 있었고, 속옷만 입은 채로 헤엄쳐 강을 건넜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에 물이 차가운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참전했던 할아버지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고 합니다.

"(6•25전쟁 때) 고지를 점령했는데 소대장들 넷이 뱅 둘러서 밥을 먹는데 포탄이 떨어지더라고. 그게 터졌으면 우리 다 죽는 건데, 불발탄이야…."


■ 이맘때면 더욱 그리운 어머니의 냉면… "어머니의 그 맛이 안 나"

고향 집을 나설 때 호주머니 속 깊숙이 챙겨 넣었던 부모님 사진은 강을 건너면서 젖어 망가져 버렸습니다. 타향살이 70년, 사진 한 장 없이 부모 생각에 사무칠 때면 할아버지는 냉면집에 들러 고향의 흔적을 찾습니다.

"이북에서는 집집마다 냉면 누르는 통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반죽을 통에 넣고 위에서 저 혼자 누르면 안 내려가서, 아버지와 같이 눌러서 냉면을 뽑아 먹던 기억이 나요."


2021년 겨울 눈 내리는 어느 날, 인터뷰를 하면서 냉면 한 사발에 소주 한 잔을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눈시울이 촉촉해집니다. 어머니의 손맛이 사무치게 그리워서일까요.

"겨울에도 주로 냉면을 많이 먹었어요. 냉면 먹는데 눈 내리고 하니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 '고기 백반에 소주 한잔 대접 못 한 게 한(恨)'…"하늘나라에서나마 효도하겠습니다."

만약 생존해계신다면 110세, 113세이실 아버지 어머니께, 93세의 김원진 할아버지는 닿기 어려운 영상 편지를 써봅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천 번, 만 번 용서해주십시오.
그저 제일 바라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께 따뜻한 고기 백반을,
그리고 소주 한잔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나마 마음껏 효자 노릇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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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호 기자 (sputni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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