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⑰ 개성의 고려박물관
관리보존 위한 유물 수장고 절실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개성을 방문했을 때 꼭 가봐야 할 곳이 고려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개성지역에서 발굴된 고려시기의 유물과 유적이 모아져 있다. 고려박물관은 독자적인 건물이 아니라 고려성균관(국보유적 제127호)의 여러 건물들을 활용해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다.
고려성균관은 고려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고려는 992년에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했다. 1304년(충렬왕 30)에 국자감의 이름을 국학(國學)으로 바꾸면서 대성전을 짓고,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유교의 교리에 따라 대부분의 건물들은 소박하게 지어졌다. 특히 고려 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던 역사적인 곳이다.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성균관의 책임자인 대사성을 맡았고, 정몽주(鄭夢周)가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조선 초에 한양에 성균관을 지으면서 개성 성균관은 향교가 되었으나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현재 건물들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복원한 것이다.
약 1만㎡의 부지에 18동의 건물이 남북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크게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구역이 앞쪽에 있고, 대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배향(配享) 구역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홍살문 형태의 외삼문으로 들어서서 은행나무를 둘러보며 마당을 지나면 명륜당이 나온다.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 향실과 존경각이 있고, 그 앞쪽 좌우로 학생들의 숙소였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 뒤편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공자를 제사 지내던 대성전이 나오고, 그 앞뜰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자리 잡고 있다.
북한은 국보유적인 고려성균관의 명륜당·대성전·동재·서재·동무·서무·계성사·존경각·향실 등 성균관 건물 18채를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의 해설강사는 고려성균관이 고려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87년 8월 개성시 역사유적들의 보존실태와 그 관리정형을 요해(시찰)하시고 고려시기 중앙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에 박물관을 새로 꾸려 고려시기의 특색 있는 유물들을 진열하며, 그 주변에는 고려시기의 돌탑들과 비석들을 옮겨 세우고 활쏘기장과 그네터를 비롯한 민족경기장과 민속놀이터를 갖춘 유원지로 꾸릴 데 대하여 지적하시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88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됐다는 설명이다.
개성에 처음 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이었다. 개성부립박물관은 1930년 개성이 읍에서 부(府)로 승격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일부 기업과 은행, 지역유지들의 발의로 대화정의 부청부근에 부지를 정하고, 다음해에 문을 열었다. 해방 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장(1947∼52년)을 지낸 진홍섭의 회고에 따르면 1931년 11월 1일 개성부립박물관이 개관하기 전 일부 사람들의 발기로 만월대 앞에 고려시대 유물을 수집해 전시하는 진열관이 있었는데 오래 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주로 낙랑과 고구려 시대, 고려시대의 유물을 전시했다. 해방이 되자 개성부립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개성분관으로 개편됐다.
당시까지도 해도 개성은 38선이남이라 미군정의 관할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발발 1년 전 38선이 지나가는 개성 송악산을 두고 남북 간 전투가 빈번해지자 개성분관에 보관돼 있던 고려청자와 주요 유물을 모두 서울로 옮겼다. 전쟁이 끝난 후 개성은 북한지역으로 편입됐지만 개성분관에는 아무런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휴전 후 35년이 지난 뒤에야 북한은 개성에 다시 박물관이 설립했다. 고려박물관은 현재 4개의 전시관으로 되어 있다. 동무에 꾸민 제1전시관에는 고려시대의 개성 지도, 고려의 왕궁이었던 만월대의 모형, 왕궁터에서 출토된 벽돌과 기와 등의 유물,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의 능에서 발굴한 금동공예품·옥공예품·청동말 등의 유물, 고려시대의 화폐 등 고려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성전에 꾸민 제2전시관에는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금속활자, 고려첨성대 자료, 청자를 비롯한 고려자기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계성사에 꾸민 제3전시관에는 개성시 박연리 적조사터에서 옮겨온 쇠부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무에 꾸민 제4전시관에는 불일사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탑 3기를 비롯하여 여러 모양과 무늬의 청동거울, 청동종, 청동징, 청동화로, 공민왕릉의 조각상과 벽화 등 금속공예·건축·조각·회화에 관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중 적조사쇠부처(鐵佛, 국보유적 제137호)라고 불리는 적조철조여래좌상이 별도로 국보유적으로 지정돼 있다. 원래 개성시 삼거리에 있던 적조사(寂照寺) 터에서 발굴된 것을 옮겨온 불상으로 높이는 1.7m이다.
이 불상은 철로 만들어진 석가여래상으로, 색조가 검고 몸체는 늘씬하다. 머리는 나발이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데 허리를 세우고 있어서 강한 남성미가 풍긴다. 별다른 치장은 없으나 당당한 체구와 오른쪽 허리로 흘러내린 법의의 생생한 옷 주름, 얼굴의 미소 등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이는 불상이다. 고려 초기 철조불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고려박물관은 유물 보관 외에도 시민과 학생들의 역사교양 장소로, 국내외 관광객들의 참관지로 활용되고 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의 촬영지로도 선호되고 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고려성균관의 서쪽 문을 나오면 개성과 인근지역의 절터 등에서 옮겨온 유적과 문루 등이 전시돼 있다. 야외전시장인 셈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유적이 현화사(玄化寺) 터에서 옮겨온 탑과 탑비다. 현화사는 원래 장풍군 월고리 영추산 남쪽 기슭에 있던 사찰로, 고려시대 역대왕실의 각종 법회가 열렸던 도량이었지만 언제 폐사됐는지는 정확치 않다. 현화사터에는 7층석탑, 석비(石碑), 당간지주(보존유적 제534호), 석불잔석(石佛殘石), 석교(石橋), 석등(石燈) 등이 남아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석등은 서울로 옮겨졌고, 7층석탑과 석비는 현재 고려박물관 야외로 옮겨졌다. 그리고 당간지주 등은 여전히 현화사터에 남아 있다.
현화사 7층탑(국보유적 제139호)은 1020년(고려 현종 11)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으로, 높이는 8.64m이다. 지대석 위 단층 기단, 7층의 탑신부, 정상의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 석탑이다. 탑신부의 각층 탑신석은 4면에 모두 감실형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불상과 보살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탑신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균형감이 있다.
7층탑 옆에 옮겨진 현화사비(국보유적 제151호)는 1021년(고려 현종 12)에 조성된 사적비로, 화강석으로 된 귀부와 대리석으로 된 비신 및 이수(螭首)로 구성된 비석이다. 전체 높이는 4m이다.
비신 앞뒷면에는 현화사의 창건 내력과 규모, 연중행사 등을 기록한 2400여 자의 명문이 기록돼 있다. 비신 앞면에는 현종의 어필로 '영추산대자은현화사지비명(靈鷲山大慈恩玄化寺之碑銘)'이라는 비명(碑名)이 새겨져 있다.
현화사7층탑을 감상하고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흥국사탑(興國寺塔)과 개성 유수영(留守營) 문루가 나온다. 흥국사탑(국보유적 제132호)은 평장사 강감찬(姜邯贊)이 1018년(고려 현종 9) 고려를 침략해온 거란군을 무찌른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1021(현종 12)년 5월에 조성됐다. 원래는 개성 만월대 인근 흥국사터에 있던 것을 옮겼다.
흥국사탑은 단층 기단과 탑신부로 구성된 일반형 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5층탑(원래는 7층탑이었다고도 함)으로 세워졌지만 현재 지대석과 기단, 옥신석 1개, 옥개석 3개만이 남아 있다. 높이는 4.4m 가량이다. 이 탑 속에는 강감찬의 제시(題詩)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가 있었다고 한다. 건립 양식이나 수법이 뛰어나고 세운 연대가 명확해 고려시대의 탑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흥국사탑 뒤쪽에 서 있는 개성 유수영 문루(보존급 제522호)는 원래 개성 북안동에 있던 것을 옮겨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8.21m), 측면 1칸(4.05m)의 2층 누각이다. 1394년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왕조는 고려 수도였던 개경을 개성으로 고쳐 부르고, 지방 행정단위로서는 가장 높은 유후사를 설치했다.
그후 1438년에 유후를 유수로 변경하고, 유수영의 여러 건물들을 지었는데 그 정문으로 세운 것이 바로 이 문루다. 지금의 문루는 1768년에 여러 관청건물들과 함께 고쳐지은 것이다. 석주에는 '관리중진', '분사고도(分司故都)'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흥국사탑 아래쪽에는 불일사5층탑(佛日寺五層塔, 국보유적 제135호)이 옮겨져 있다. 불일사는 951년(고려 광종2) 고려 광종이 개성시 보봉산 남쪽 기슭에 어머니 유씨의 원당(願堂)으로 세운 사찰이다. 조선 중기에 불일사가 폐사된 뒤 대웅전 앞에 있던 5층탑은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1960년 무렵에 이곳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높이 7.94m로, 재질은 화강석이다. 이 탑을 옮길 때 첫 단과 둘째 단의 탑신 안에서 금동탑, 고려청자, 사리함, 구슬 등 20여 개의 불교 유물들이 발견돼 현재 고려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 그리고 정상의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 석탑이다. 노반석과 보주로 된 상륜부는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었다. 기단은 한 변의 길이 4.32m이다.
이외에도 개국사터에서 옮겨온 개국사석등(보존유적 제535호), 개성 남대문 옆 낙타교(駱駝橋) 에서 옮겨온 주춧돌, ‘임진왜란 때 임진강전투에서 전사한 부원수 유극량과 고려 말의 문신 우현보의 집터에서 옮겨온 유극량유허비(劉克良遺墟碑, 보존유적 제1540호)와 우현보유허비(禹玄寶遺墟碑, 보존유적 제1539호), ’임진왜란‘ 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유허비 (보존유적 제1542호) 등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그리고 고려박물관 서쪽 언덕 위에 고려 때 만든 탑동3층탑(塔洞三層塔, 보존유적 제539호), 고려 중기에 조성된 원통사부도(圓通寺浮屠, 보존유적 제531호), 고려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복령미륵석불(福靈彌勒石佛, 보존유적 제1548호)과 미륵사미륵석불 (보존유적 제1547호) 등이 옮겨져 있다. 복령미륵석불은 개성시 해선리에서 발견된 것이고, 미륵사미륵석불은 일제강점기 때 개성시 동흥동 미륵사터에서 개성부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던 것이다.
개성부립박물관에서는 미륵사미륵석불은 별도의 전각을 지어 관리했지만 현재는 야외에 그대로 세워져 있다. 고려박물관의 유물과 유적들도 방습, 항온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로 전시, 관리되고 있다. 귀중한 고려시기 유물과 유적을 제대로 관리, 보존할 수 있는 수장고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남과 북의 협력사업으로 고려성균관 옆 부지에 별도로 고려박물관을 건립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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