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법원장
김 대법원장을 처음 장식한 수식어는 '파격'이었다. 조진만 전 원장 이후 49년 만에 나온 비대법관 출신 대법원장이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15기로, 전임 양승태 전 대법원장보다 13기수나 아래였다. 김 대법원장은 "저는 31년5개월 동안 사실심(1·2심)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호흡하며 재판만 해온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어떤 수준의 모습인지를 보여드리겠다"며 '좋은 재판'을 약속했다.
김 대법원장이 취임 후 가장 먼저 해결에 나선 과제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진상조사였다. 이탄희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이 사건은 양 전 대법원장에게 불명예 퇴진을 안겼다. 김 대법원장은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지지를 기반으로 3차 진상조사까지 밀어붙였다.
이들이 주장한 것과 같은 블랙리스트 문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특정 사건 재판을 거론하면서 상고법원을 위한 '카드'로 검토할 수 있다는 등 내용이 담긴 내부문건이 다수 발견됐다. 양승태 사법부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진행한 '물밑 작업'의 흔적들이었다. 이 사건에 '사법농단'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는 비판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후 사법농단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다. 사실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제는 김 대법원장의 태도였다.
여론이 판사들을 '적폐'로 몰아붙이고 검찰이 강도높은 수사들을 진행하는 동안 판사들의 자괴감은 날로 커졌다. "내가 적폐냐"며 스스로를 비웃는 판사도 있었다. 김 대법원장은 내부 분위기를 전혀 추스르지 못했다.
2018년 10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구속되자 판사들 사이에서는 "십자가를 졌다"는 탄식이 나왔다. 다음달 임 전 차장은 구속기소됐고,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판사들을 탄핵해야 한다는 입장을 결의했다. 판사들의 협의체가 '동료들의 법복을 벗기자'는 것을 공식 입장으로 채택했다는 사실에 많은 법관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이 시기 김 대법원장을 주로 수식하는 단어는 '침묵'이었다. 많은 판사들이 김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을 기다렸지만 김 대법원장은 응답하지 않았다. 법원 안팎에서 사법독립에 대한 우려, 김 대법원장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이때도 김 대법원장은 침묵했다. 한 달쯤 뒤 전국법관회의 전체회의장에 나와 "사법부를 위한 미래의 토대를 만들기 위함"이라며 검찰 수사를 정당화했다. 어느덧 김 대법원장을 "대법원장"이라 부르지 않는 판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렇게 김 대법원장을 향한 내부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김 대법원장은 묵묵히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업들을 추진해 나갔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를 골자로 한 법원 인사제도 개혁, 스마트법원 사업 등이다. 김 대법원장은 "법관을 승진에 길들이는 통로로 악용된다"며 고법부장 승진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제도를 폐지했다. 법원장 인사도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하향식에서 일선 판사들이 후보자를 선출하는 상향식으로 변경했다.
제도 개정 당시 김 대법원장은 "수평적 패러다임"이라고 취지를 설명했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실패로 평가된다. 엘리트로 평가받던 고위, 중견법관들이 대거 사표를 던지고 법원을 나왔다. 이번 2월 인사 때는 사표를 던진 인원 수가 80여명이 이르렀다.
이에 아들 부부가 분양대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집을 비우고 공관에 들어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대법원은 "대법원장의 아들 부부가 친정에서 살다가 친정이 집을 팔면서 공관으로 들어갔고 곧 이사를 나오기로 했다"며 "가족이 공관에 함께 살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고 해명했다.
법원 내부의 불만은 계속 곪아갔다. 그러다 임성근 부장판사 사건으로 폭발했다.
여권은 임기만료를 한 달 앞둔 임 부장판사를 그대로 보낼 수 없다며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난 직후라 '사법부 길들이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최 대표는 조국 전 장관 아들에게 끊어준 인턴증명서는 진짜라고 주장했으나, 1심 법원은 최 대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거짓말 논란도 불거졌다. 김 대법원장은 건강이 좋지 않아 사표를 받아달라는 임 부장판사의 요청을 세 번이나 거절했다. "국회에서 탄핵 논의를 못하지 않느냐", "이런 비난을 받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를 댔다. 처음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다 임 부장판사가 녹취를 공개하자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했다"고 말을 바꿨다.
동시에 이번에 단행한 정기인사를 놓고 코드인사 논란이 재점화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등 요직에 또 우리법·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보임했다.
뿐만 아니라 임종헌 전 차장, 조국 전 장관 등 중요 피고인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가 인사 관례와 원칙과 다르게 편성돼 논란을 키우고 있다. 특히 정경심 교수의 항소심 재판부가 전부 교체되고, 김 대법원장이 행정처 기조실장으로 중용했던 부장판사가 배치된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이에 법원 안팎에서 김 대법원장을 향한 사퇴론이 격화되고 있다. 판사들은 포털사이트에 개설된 익명게시판을 통해 "아침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대법원장님은 '쏘리' 한 마디 하고 발뻗고 주무셨습니까", "증거를 들이대야 실토하느냐", "대법원장의 민낯을 봤다는 게 충격" 등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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