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저만 일하는 줄 알았습니다" 기자를 부끄럽게 만든 5명의 시민들
취업에 성공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올해는 꼭 코로나19 종식됐으면"
몇 주 전 공지된 이번달 당직근무표. 2월 12일 설 당일 '사회부 근무자' 옆에는 또 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2년 연속 설날 근무입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입니다.
12일 이른 오전 좌절감에 빠진 채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 주변을 둘러보니 어디론가 바삐 향하는 사람들이 전동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혼자만 일하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괜히 짜증을 냈던 제가 부끄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모두가 쉬는 휴일,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는 민족의 대명절이지만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모임 금지 때문에' '다른 동료들이 휴식을 취했으면 해서' 등 설에 일하는 이유도, 그 사연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조용히 자신의 일터를 지키고 있는 시민 5명을 한국일보가 가족들 대신 만나봤습니다.
"올해도 사고 없이 안전 운전... 아픈 아내 건강했으면"
"오랜만에 손님이 탔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출근길에서 만난 버스기사 이경규(60)씨. 그가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몬 지 올해로 딱 20년째랍니다. 설날인 12일에도 이씨는 평소와 다름 없이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2시까지, 서울 한 바퀴를 두 번씩 돕니다. 그는 "버스터미널에서 4명 태운 것 말고는 자네가 첫 손님"이라면서 반갑게 맞아줬습니다. 직장인들로 붐비는 평소와 달리 텅 빈 버스 안은 참 조용했습니다.
회사 내 고참이라 쉴 만도 할텐데, 그는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막내 기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설 연휴에 한 번도 쉰 적이 없다고 합니다. 버스기사로 일하는 20년 동안 이씨는 목과 허리에 디스크 증상이 와 수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소위 버스기사의 3대 직업병이라는 '디스크·치질·방광염'은 그도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수술 후에는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지만,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초보 때는 선배들이 쉬어야 되서, 지금은 다른 사람들 쉬라고 제가 나와서 일하고 있어요. 몇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요즘엔 차례도 안 지내니까요. 사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도 저는 일하러 나오고 다른 형제들끼리만 모이는 경우도 많았지요. 나 같은 사람은 집에 있어도 별로 할 일 없으니 일하러 나와도 괜찮아요. 안사람이 아파서 일을 안 하면 안 되는 형편이기도 하고요."
그는 이날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 아내와 딸, 셋이 오붓하게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볼 딸 생각에 이씨의 얼굴에선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올해도 사고 없이 안전하게 운행 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몸이 안 좋은 아내 건강이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딸도 좋은 소식(결혼) 있었으면, 그거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병원서 맞는 9번째 설 연휴... 기혼 선배들 위해 근무 자청했어요"
"이번 설날에는 환자분들 가족들과 영상 통화 도와드리느라 정신 없어요."
서울아산병원 암병동에서 근무하는 김진영(31)씨는 9년차 간호사입니다. 그는 이번 설날에는 오후 근무조로 편성돼 오후 2시부터 11시까지 입원 환자들을 간호·간병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경남 거제도가 고향이지만 김씨는 간호사가 되고 명절 때 단 한 번도 집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아직 미혼이라, 명절에는 늘 기혼인 선생님들이 오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서 근무하고 있어요. 아빠, 엄마, 친척어른들 죄송합니다(웃음). '빨간 날'이라 수술 잡힌 건 없어서 조용한 하루가 예상되지만, 언제 응급 상황이 터질지 모르잖아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돼요."
김씨가 담당하는 환자들은 대장암, 간암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거나 수술을 마치고 퇴원 준비를 하는 60, 70대가 대부분입니다. 설날이지만 가족들을 만날 수 없는 환자들을 달래주는 것도 김씨의 몫입니다. 특히 신종 코로나로 문병객을 받지 못하면서, 올해 설날 병동 풍경은 예년과 달리 고요하다고 합니다.
"조용하지만, 그래도 명절은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말수가 없는 할아버지 환자도 오늘은 본인 옛날 이야기를 신이 나서 들려주세요. 다인실의 어떤 할머니 환자는 휴대폰에 저장된 손자 손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엄청 하시고요. 병원, 특히 암병동은 환자들이 하루하루를 도전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살아야 하는 곳이잖아요. 설날은 다들 활기차 보이셔서, 저도 덩달아 힘이 나요."
"퇴근하고 마누라랑 떡꾹 한 그릇이랑 막걸리 한 병 '뚝딱' 해야지"
"마음이야 30, 40대지만 이 늙은 노인네를 어디서 받아주겠어. 어렵게 구한 경비원 일 열심히 하는 거지."
12일 오전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 앞에서 만난 경비원 김삼회(64)씨. 지난해 4월부터 이곳에서 일하기 시작해 오늘로 10개월째가 됐다고 합니다. 보통의 경우 경비원은 주휴일이 따로 정해져 있어 대부분의 경비원들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연휴에도 평소처럼 출근해 업무를 본다고 합니다. 김씨도 이날 오전 8시에 출근해 순찰을 한 번 돌고, 오전에는 아파트 앞 쓰레기통의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설날 근무도 별다른 건 없어요. 순찰 돌고, 주민들 주차 관리하고. 또 아파트가 지은 지 좀 돼서 하수도가 샌다던가 이런 민원 들어오면 출동하고. 중앙관제소에서 가끔 강아지 대변 치우라고 연락이 오기도 해요. 그래도 설에는 주민들이나 방문객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새해 인사도 나누니까 마음도 풍성해지지."
그는 이날 점심을 전날과 똑같이 작은 경비실 안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으로 해결했습니다. 난방을 꺼둔 경비실에 오랜 시간 도시락을 놓아둔 탓인지, 유난히 딱딱해진 찬밥을 그는 국도 없이 김치와 함께 씹어 삼켰습니다.
"딸이 둘인데, 둘 다 결혼했어. 이번 설은 신종 코로나 때문에 5인 이상 모이면 안 되니까 오지 말라고 했지. 나는 일 나가야 하니까 절대 오지 말라고. 정말 코로나가 뭔지. 곱창집 하는 막둥이부터 음식점하는 조카사위까지, 다들 울상이야. 빨리 이놈의 전염병 끝났으면 좋겠어. 퇴근해서 마누라랑 떡국 한 그릇하고 막걸리 한 잔할 생각이야."
"오늘이 마지막 근무... 3월부터 출근할 새 직장, 벌써부터 두근두근"
"사실 지난주까지가 마지막 근무였어요. 그런데 저 대신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사장님 부탁으로 나온 거예요. 오늘이 정말 '마지막 근무'인 셈이죠."
예비 어린이집 교사 이수지(22)씨는 12일 오전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에서 막 입고된 삼각김밥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편의점에서 일한 건 올해로 4년째입니다. 2017년 대학 입학 후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 졸업할 때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부모님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4년 내내 강의시간표의 '화, 목'은 아르바이트 시간으로 비워서 짰다고 합니다.
"처음엔 일주일에 2번, 한달 50만원씩 받다가 적금을 넣다보니 욕심이 생겨서 근무 타임을 늘리기도 했어요. 이곳 편의점은 커피나 도시락, 라면이나 계란 등을 사가는 손님들이 많은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서 즐겁게 일했어요."
이번달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새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어린이집에 출근합니다. 얼마 전 합격 통보를 받고 뛸듯이 기뻤다는 그. 어엿한 사회인으로 첫 발을 내딛게 됐지만,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하는 걱정에 밤에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너무 걱정돼요. 이건 비밀인데, 사실 엄청 떨고 있어요. 빨리 적응해야되는데, 잘못해서 실수하면 어떡하나 고민도 많고요. 그래도 첫 출근은 2주 뒤니까 그동안 준비를 많이 할 거예요."
아무리 사장님 부탁이라도 설날에 근무하게 된 이유를 묻자 재밌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저희 가족이 5명이거든요. 그런데 5인 이상 모임 금지라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서 흔쾌히 승낙했어요.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마지막이라니 좀 아쉽기도 했거든요.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한다면 편의점 아르바이트 '강력 추천'합니다. 특히 대학생이라면 첫 아르바이트로 시작하기에 편의점이 제일 무난하지 않을까요."
"신종 코로나로 미뤄진 결혼식... 내년엔 꼭 치렀으면"
서울 중부경찰서 을지로3가파출소 소속 박건주(29) 경장은 지난해 말 결혼한 새신랑입니다. 혼인 신고는 했지만, 신종 코로나 때문에 아직 결혼식은 치르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 맞은 첫 명절이지만 '경찰'이기에 이번 설엔 고향인 대구에 내려갈 생각은 꿈에도 꾸지도 못했습니다. 24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입직한 박 경장 또한 경찰이 되고 나서는 명절에 단 한 번도 부모님 얼굴을 뵙지 못했다고 합니다.
"근무가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경찰 특성상 명절 때 쉬는 경찰관은 단 한 명도 없어요. 대신 오히려 남들 일할 때 쉬기도 하잖아요. 전혀 힘들지 않아요. 부모님은 그런 경찰관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셔서, 오히려 절대 오지 말라고 만류하셨어요. 특히 이번 설은 신종 코로나 때문에 귀향을 자제하는 분위기잖아요. 그래서 택배로 과일 선물을 보내드렸어요.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설이니까요."
경찰관의 설날은 평소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날 주간 근무조였던 박 경장은 오전 8시에 근무에 투입, 순찰을 돌고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하느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설 같은 명절에는 다른 때와 달리 은행 등 금융기관, 현금인출기(ATM), 편의점 등을 중점적으로 살핀다고 합니다. 세뱃돈 등 현금 거래가 많은 설 특성상 관련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합니다.
"빨리 코로나가 종식됐으면 좋겠어요.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현장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분들이 많아요. 감염 예방 차원에서 하나하나 안내해드리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돌발 상황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코로나로 잠시 미룬 결혼식을 빨리 하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얼굴로 식장에서 만나는 게 제 올해 소원입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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