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 언제 보나..키보다 긴 팔로 아들 감싼 '이중섭 그림'
일본 보낸 가족 그리며 '친구 구상의 가족' 그려
희망 상징 붉은빛 물감 버릴 만큼 상실감 시달려
사주기로 약속한 자전거 타고 달리는 두 아들을
자신과 부인 이남덕 팔 뻗어 지키는 그림편지도
쪼그리고 앉은 시인 친구는 자전거 탄 아들과 놀아주며 연신 미소를 짓는다.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가는 불현듯 화심(畵心)이 일었다. 쓱쓱 스케치한 뒤 여러 번 덧칠하고 긁은 그림으로 떠서 옮겼다. 까르르 소리가 들릴 듯한 부자의 자전거 놀이와 옆에서 지켜보는 부인, 그리고 또 다른 아들 모습까지. 행복한 가족의 한 때가 화폭을 채웠다.
벌써 66년이나 된 작품이다. 이상하게도 어딘지 모르게 슬프고 불편한 느낌이 밀려온다. 화면 오른쪽 끝에 앉은 화가와 왼쪽 끝에 머리를 획 돌리고 얼굴을 감춘 아이 때문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화가는 친구 가족을 지켜본다. 두툼한 입을 다물고 앞을 응시하는 품이 쓸쓸해 보인다. 화가의 내력을 살펴보니 짚이는 게 있다. 멀리 현해탄 건너 일본에 떨어져 있는 어린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숱하게 편지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하는 처지였던 것. 지켜보는 그 마음이 오죽 부럽고 쓰라렸을까. 그래서 작은 종이에 황톳빛 톤을 엷게 깔고 그은 연필 자국이 더욱 진한 것이 아닐까.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층에서 만난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시인 구상의 가족>은 애잔한 느낌을 준다. 그림은 작지만 사연은 장강처럼 흐른다. 색조는 밝지만 분위기는 어둡다. 인물의 표정은 발랄하지만, 음울함이 그늘처럼 깔렸다. 양면적 요소가 도드라지는 그림이다. 절친했던 시인 구상(1919~2004)과 소설가 최태응(1916~1998)과의 아련한 추억이 깔려있다.
<시인 구상의 가족>은 1955년 화가가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 때 즈음 그린 작품이다. 그는 서울 미도파 백화점 전시회와 대구 미국공보원 개인전을 통해 1952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만나러 갈 여비를 마련할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작품은 어느 정도 팔렸으나, 구매자가 돈을 주지 않거나 작품을 빼돌리는 통에 수익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대구에서는 출품작이 춘화 아니냐는 논란까지 불거져 경찰이 철거할 것이라는 풍문까지 떠돌았다. 일본에 갈 길은 멀어지고 그의 심중은 실망과 한탄으로 가득했다. 이중섭은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말수도 크게 줄었다. 낙심한 채 경북 왜관에 있는 구상의 집과 대구에 있는 최태응의 집을 전전했다. 희망을 상징하는 붉은빛 물감을 내팽개칠 정도로 상실감에 휩싸였다. (서울로 돌아온 뒤 이런 절망감은 정신분열로 악화해 작가를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러던 중 이중섭은 구상의 집 뜨락에서 구상이 작은아들과 자전거 타는 모습을 평상에 앉아 지켜보게 됐다. 내색은 못 해도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던 심사를 자화상 같은 자신의 모습과 함께 풀어냈다. 이미 구상을 따라 가톨릭에 귀의하고 싶다고 고백록 같은 글(덕수궁관 전시장에 있다)을 쓰기도 했던 이중섭은 체념한 듯한 자기 모습도 그려 넣었다. 전시를 기획한 김인혜 학예연구관은 “수없이 연필로 선을 긋고 그 위에 유화물감으로 칠한 후 긁고 다시 칠해 여러 겹 층을 쌓는 독특한 기법이 이 작품에 도드라진다”고 설명했다.
화면 오른쪽 작가와 더불어 왼쪽 끝에서 구상의 가족을 등지고 돌아선 아이의 정체도 궁금하다. 그는 구상의 집에 잠시 의붓자식처럼 머물던 소설가 최태응의 딸 영철이다. 뒤통수만 보이는 모습에선 우리 엄마·아빠는 언제 나를 데리러 오냐는 무언의 호소가 느껴진다. 구상의 유족이 남긴 증언을 들어보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지켜보는 여성은 의사로 왜관 집 옆에 병원을 차린 부인 서영옥이다.
이중섭은 구상의 아이들과 최태응의 딸을 함께 본다. 최태응 딸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낀다. 작가의 뻗은 손이 구상 아들 손과 닿아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원근법상으론 닿지 않는다. 그런데도 화면에서 닿게 한 건 분명 맥락이 있을 터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작용했을까. 물고기와 아이를 그린 이중섭의 주요 작품도 유심히 보면, 도상들이 반드시 어느 지점에선가 만난다. 부인 마사코와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의 삽화에도 이중섭은 팔이 길게 늘어난 모습으로 가족들과 접촉한다. 사람, 동물, 남남까지 다 연결되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중섭 나름의 기법으로 표현한 연기 세계의 꿈인 것일까.
작은 그림이지만, 대단한 필력을 부려놓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연마한 세부 묘사력은 몇 번의 붓질만으로 인물의 주요 특징을 그려낼 만큼 뛰어나다. 이중섭의 말년작은 어떤 그림이든 층(레이어)을 쌓는다. <시인 구상의 가족…>에서도 대부분의 도상과 배경이 긋고 덧칠한 다음 다시 긁고 덧칠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김 연구관은 “소품이지만, 그림 속 구상과 이중섭의 얼굴은 소름 돋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기본 데생력 워낙 뛰어나니 스타일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배경은 지금도 남아있다. 등장인물 뒤에 있던 병원 자리는 원래 구조를 일부 살린 구상 기념관이 됐다. 최태응의 딸이 고개를 돌려 지켜본 강은 낙동강 지류로 지금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다만, 그림 속 어른과 아이는 60년이 지닌 지금 대부분 고인이 됐다. <…구상의 가족들>은 2층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의 3부 ‘이인행각’에 전시됐다. ‘이인행각’은 평생을 함께 예술의 길로 나갔던 문인과 미술가 2인을 조명한 섹션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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