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해 없게 도와주길"..'직장내 성폭력' 판결문에 적힌 당부
5년 전 여름, 직장인 A 씨를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로 만든 사람은 멘토를 자처하던 26년 차 회사 간부였습니다.
경력 관련 상담을 해 주겠다며 만남을 제안한 뒤, A 씨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팔목을 이끌고 노래방과 호텔 등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돌변해 A 씨를 여러 차례 성추행했습니다.
굴지의 대기업 직원으로서 쌓아온 "10여 년의 무탈하고, 평온하고, 촉망받던 시간들"은, 그날 그 사건으로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고 A 씨는 회상합니다.
휴대전화 액정에 뜬 이름만 봐도 역겨움이 밀려오는 그 사람에게, '진실된 사과'만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가까운 시간 동안 가해자는 경력과 가정 등 본인이 지켜야 할 게 얼마나 많은지만 강조할 뿐이었습니다.
회사에 일을 알리지 말라는 가해자의 집요한 연락 속에 두려움에 떨던 A 씨는, 조직의 보호를 구하며 사건을 신고했습니다.
■ 헛소문만 남기고 '비공개' 퇴사한 가해자…이어진 2차 가해
"심한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한 번만 살려달라"고 A 씨에게 호소하던 가해자. 인사부 조사가 시작되자 곧장 태도를 바꿨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좋아했다." "노래방에 가는 사이에 그 여자가 먼저 손을 잡고 팔짱을 꼈다." "함께 즐기고 돈을 요구하는 꽃뱀이다."
가해자의 악의적인 거짓 진술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A 씨는 회사의 공식 기구와 절차를 믿고 3개월가량 사건이 잘 처리되길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A 씨는 뉴스를 통해 가해자가 퇴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했습니다.
퇴직 소식은 인사발령지에 공지돼 왔지만 회사는 유독 가해자의 퇴직 절차를 비공개로 진행했고, 피해자인 A 씨에게조차 그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던 겁니다.
회사엔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에게 징계 처리 결과를 알릴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는 사과는커녕 "여름 성수기라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봐 비공개로 처리했다"는 변명만 내놨습니다. 가해자가 인사부 간부와 친분이 있었고,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회사 법무실이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A 씨 사건을 사례로 들어 관리자급 직원들을 교육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가해자의 직장 동기들을 인사권자로 둔 채 사내에서 헛소문과 수군거림에 시달리던 A 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회사 식당에조차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자, A 씨는 '미혼 여성'에게 누가 될까 만류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사건 발생 2년 뒤 가해자를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가해자가 만들어 낸 헛소문 속의 여성과 같은 인생을 단 한 순간도 살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소명하고,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아 명예를 되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 "반성" 고려했다는 1심 판결, '2차 피해' 살핀 민사재판
가해자는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뒤에야 본인이 저지른 일을 모두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이에 첫 재판이 열린 뒤 석 달도 안 돼 1심 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서울남부지법은 2019년 6월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가해자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또 사회봉사 120시간과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 40시간도 명령했습니다.
이 같은 유죄 판결에도 A 씨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을 참작했다는 양형 이유를 판결문에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진심 어린 사과 없이 감형을 위해 전화 한 통으로 형식적인 합의금 '천만 원'을 일방적으로 제시하고, 피해자가 마치 무리한 합의금을 요구한다는 듯 재판에서 언급했던 것이 A 씨가 기억하는 가해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양형 요소가 되는 '반성'의 기준은 명확해야 하고 특히 피해자의 관점에서 고려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A 씨는 항소를 원했고, 담당 검사는 이를 받아들여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습니다.
한편 항소심 재판이 진행되던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법은 A 씨가 가해자를 상대로 제기한 3천만 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위자료 2천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기도 했습니다.
재판부는 "피고(가해자)의 이 사건 성희롱, 성추행 및 그 처리 과정에서 원고(A 씨)가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당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가해자의 거짓 진술로 A 씨가 입은 극심한 2차 피해를 살펴줬다는 점에서 너무도 고마운 판결이었습니다.
가해자는 이 판결에 항소하지 않고 A 씨에게 위자료를 지급했습니다. 또 형사재판 항소심에서 변호인을 통해 뒤늦게 반성문을 건네며, "(사내 조사) 당시 잘못을 모면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비겁하게 지어냈다" "정말 죄송하고 사죄드리며 용서를 구한다"고 거짓 진술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사건 이후 3년 내내 잦아들지 않는 헛소문과 반복되는 근무지 변경, 진급 누락을 버텨내던 A 씨가 결국 병으로 휴직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 "진실 적힌 판결문으로 '꽃뱀' 누명 벗을 것"…응답한 법원
가해자에 대한 항소심 선고기일을 일주일 앞둔 지난해 늦여름, A 씨는 재판부에 마지막 탄원서를 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 판결문은 영구 보존된다고 들었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볼 수 있고, 판사님은 판결문을 통하여 이야기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본 형사소송에 대한 내용의 진실만을 판결문에 남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피고인이 본 형사소송 이후의 판결에 따라 또 어떠한 사실과 다른 이야기로 이 과정을 왜곡하고, 저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할지 알 수 없기에, 저에겐 소송의 결과와 판결문이 의미 있고 중요합니다. 이는 피해자로서의 과도한 피해의식이 아닌, 그간의 피고인의 반복된 행동에 대한 제 두려움과 걱정의 반영입니다.
저는 본 재판의 판결문을 회사 인사부서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피고인의 소문으로 고통받아 괴로움을 지속 호소했던 제게, '퍼뜨린 소문을 바로 잡을 방법이 없다'며 그냥 방치만 했던 피고인의 지인이자, 본 사건을 담당했던 인사 담당자들에게 이 판결문을 보여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퍼져나간 소문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정의로운 재판을 통해 제가 피고의 소문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꼭 밝히고 싶습니다. 평생 남을 판결문을 통하여, 사내에 퍼져있는 왜곡된 사실을 바로 잡고 싶습니다. […] 전 피해자이지 꽃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처벌을 떠나 제 자존감과 제 인격과 명예에 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에 재판부는 "그동안 피해자가 제출했던 많은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겠다"며 선고기일을 연기했고, 한 달 뒤에야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추행의 정도가 중하고, 범행 이후 피해자가 이 사건과 관련된 주위의 잘못된 평판 등으로 극심한 정신적 피해를 보게 돼 직장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피해자로부터 지금까지도 용서받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피해자는 견해를 달리하지만, 피고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 초범이고 민사소송을 통해서나마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한 점을 참작했다면서 1심 형량을 유지했습니다.
아울러 재판부는 또 향후 판결문의 쓰임새를 고려한 듯, 마지막 문단에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같은 직장내 성추행 사건은 자칫 그 특수성으로 인해 피해여성이 2차 피해를 입을 여지가 크고, 피해자는 몇 년간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 판결 이후 피해자가 다시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고 주위 직장동료들이나 지인들도 그 피해를 이해하고 도와주기를 바란다."
피해자인 A 씨에겐 간절한 탄원에 대한 응답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A 씨는 "비록 항소가 기각됐지만, 항소를 해주신 검사님과 항소심 재판부에 너무나 감사했다"며 "진실만이 기록된 판결문을 받기 위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홀로 참고 또 참았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미래를 꿈꿀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제가 걸어온 이 힘겨운 길이, 부디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A 씨는 특히 "직장 내 성폭력 사건 그 자체로도 힘들었지만, 그 이후의 2차 가해로 인한 심리적인 대가가 너무 길고 커졌다"며 "그 사람의 아픔에 마음을 포개는 것이 '심리적 CPR'"이라는 정혜신 박사의 글을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A 씨는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를 산업 재해로 인정받은 뒤, 치료를 병행하며 복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채린 기자 (di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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