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진달래꽃' 유익서 "하늘의 이슬 받아먹으며 작품만 쓴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사람들은 진달래꽃을 따 먹기도 하고 화전을 부치기도 하고 또 술을 담그거나 약재로 쓰기도 하지요. 이렇게 널리 쓰이면서도 어디 진달래꽃을 정성들여 가꾸는 사람 있습니까. 진달래꽃은 우리나라 어디에나 퍼져 살아가고 있는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어요. 그래요.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진달래꽃은 산에서 스스로 피어나 세상을 이롭게 하지요. 일반 백성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진달래꽃을 좋아한답니다.”(18쪽)
병산의 대의에 매료돼 남로당에 입당하고 결혼까지 한 진주부청 공무원 은희는 그의 시신이 매장된 곳을 찾아 진달래나무를 심어준 뒤 인민군에 자원입대해 북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건 병산이 꿈꾼 ‘지상낙원’이 아니라 가난과 인간의 존엄이 무너진 사회였다.
“무엇보다 통탄스러운 것이, 왜 우리가 그토록 미욱했던가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왜 선악을 구분하지 못했던가…이마에 뿔이 돋아나 있을 것이라 믿는 동안에는 악마를 구분해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구 위에 천국을 만들겠다던 구호는 지옥을 만드는 데 쓰였을 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왜 한사코 외면했던가. 왜 그 잘났다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미욱한 존재들이었단 말인가.”(409쪽)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이, 소정자의 책 『내가 반역자냐?』와 양한모의 『조국은 하나였다?』, 윤기봉의 『내가 본 북녘 땅』 3권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기둥입니다. 『내가 반역자냐?』에 중심인물이 나오는데요. 실제 남로당 중앙당 간부로 활동한 실제 인물로, 이름은 없지요. 병산은 진양의 부잣집 아들로 일본에서 유학하고 온 지식인이고, 은희는 진주부청 공무원 출신입니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까.
“해방 공간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의 방황과 번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귀국했을 때 정치적 및 이념 갈등이 심하고 사회도 분열되는 등 모든 게 혼란스러워 방황하고 번민할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사회주의자, 이상주의자였어요.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 반대하는 건 사회주의가 근간이 됐기에 자연스럽게 지식인 대부분이 그쪽이었지요. 병산도 죽을 때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어요. 혁명이 조선의 위대한 미래라고, 혁명이라야 조선 땅이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한 거죠. 평등, 공평, 정의, 민주,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며 계급 차별 없는 이상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런 인물이나 상황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번 창작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요.
“『광장』의 이명준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남도 북도 선택하지 않고 제3중립국으로 가다가 세상을 등지는 참담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반해, 제 작품의 여주인공 은희는 남과 북을 다 겪은 뒤 남을 택하지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지리산 입산 때부터 시작해 빨치산들을 중심으로 한 작품인데, 제 작품은 4·3사건의 김달삼이나 이덕구, 여순 사건의 오동기 제14연대장 등 실제 인물을 그대로 썼고 남로당 간부가 자신들의 전략 수립을 위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는 등 좀더 객관적으로 그리려 노력했어요.”
1945년 부산에서 태어난 유익서는 중앙대 국문학과 입학했고 동아대 법학과 및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각각 졸업했다.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부곡」이 가작으로,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우리들의 축제」가 당선작으로 각각 뽑히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어떤 계기로 문학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까.
“저는 전쟁 때문에 고생하면서 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요. 요즘엔 없지만,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대본소’라는 곳에서 기회가 되면 돈을 주고 책을 빌려서 봤어요. 그러다보니 문학적 소양이 쌓여갔던가 봅니다. 다니다말다 하던 고교 시절, 문예작품 모집에 보냈다가 몇 군데 당선이 됐지요. 수학을 잘하지 못해 수학시험을 치르지 않는 중앙대 국문과에 합격해 다니게 됐지만, 등록금 벌이가 시원찮아 부산에 내려와 동아대 법학과 편입했어요. 동아대 4학년이던 1973년, 긴급조치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어요. 리포트로 시험을 대신한다고 해 서울로 튀었고, 출판사에 일하면서 응모했다가 신춘문예에 당선됐지요.”
그는 등단 이후 소설집 『비철이야기』(1986), 『고통의 뿌리』(1987), 『표류하는 소금』(1988), 『겨울환자』(2000), 『바위물고기』(2003), 『페인트공』(2004), 『바위물고기』(2004) 등을, 장편소설 『새남소리』(1981), 『아벨의 시간』(1984), 『민꽃소리』(1989), 『예성강』(1991), 『소리꽃』(2009) 등을 펴냈다. 특히 『새남소리』는 일제 강점기 우리 소리를 지키려는 판소리꾼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고, 『민꽃소리』는 대금 명인의 어긋난 사랑과 불행한 생애를 중심으로 전통음악의 아픈 현실을 그렸으며, 『노래항아리』는 노래에 빠진 가냘픈 소녀의 행적을 좇아 우리 음악의 근원을 탐색한 작품.
―작품 세계를 조금 설명해 주십시오.
“전반기에는 유신이나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시대를 리얼하게 그리지 못하니 상징과 알레고리 기법으로 시대 상황을 적실히 비추는 중단편을 많이 썼어요. 판소리를 공부한 뒤에는 판소리를 소재로 한 『새남소리』, 대금 산조를 소재로 한 『민꽃소리』, 노래를 찾아 자기를 불사르는 16세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항아리』 등 전통음악 이야기를 담은 책을 차례로 펴냈지요. 저는 문단 주류와 교류하지 않고 혼자 꾸준히 작품만 썼어요. 돈벌이나 명예 등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하늘이 이슬을 내려다주면 받아먹으며 오로지 작품만 썼던 거지요.(웃음)”
―스스로 생각하는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제가 아끼는 작품은 한국의 전통음악을 다룬 『새남소리』, 『민꽃소리』, 『노래항아리』 세 권입니다. 자부심도 갖고 있고요. 『민꽃소리』의 경우 평론가 김현 선생이 직접 해설도 넣어 그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89년 펴냈고, 「서편제」를 쓴 이청준 선생도 잘 읽었다고 전화를 줬지요. 1984년부터 『음악 동아』에 「명인명창을 찾아서」를 연재했어요. 전국에 있는 많은 인간문화재를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다녔지요. 기사를 쓰기 위해 관련 공부를 하면서 자연히 소양과 이해의 폭이 깊어지게 돼 전통 음악을 소재로 해서 작품을 쓰게 됐습니다.”
“1975년 잡지사 ‘뿌리깊은나무’에서 명창들을 초대했을 때, 저도 공연을 봤어요. 아주 특이했지요. 도무지 판소리를 예술로 인정할 수 없어 5년간 공부했고, 판소리를 소재로 결국 장편 『새남소리』를 쓴 것이죠. 음악은 절대 만국공통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역의 특성과 맞물려 가고, 지역의 언어나 인토네이션이 기본이 돼 음악을 이루는 것이거든요. 이런 걸 이해해 가는 과정이 상당히 오랜 시간 걸렸어요.”
―동아대에서 교직을 하셨는데, 2009년 한산도에 입도하셨어요.
“6~7년 정도 교직을 맡았는데, 작품을 쓰기 위해 2007년 그만뒀어요. 서울에서 45년 살다가 양평의 전원주택지에 들어갔다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위해 책을 한 트럭 싣고 한산도로 훌쩍 내려왔지요. 죽을 때까지 이것밖에 할 재주가 없었으니까요. 한산도엔 연고가 전혀 없어요. (지금 혼자 사는 것인가요) 혼자 내려왔어요. 오늘 아침도 제가 밥을 끓여 먹었고, 오후엔 직접 손빨래 했고요. 세탁기도 없어요.(웃음)”
―글 쓸 때 습관이나 징크스 같은 게 있는지요.
“클래식이나 가야금 산조, 거문고 산조를 CD로 틀어놓고 듣곤 합니다. 작업은 맑은 정신으로 오전에만 하는데, 아침을 먹은 뒤 소변도 보지 않고 낮 12시30분까지 하지요. 머리가 흐릿해지는 오후엔 자료나 책을 보고 검토하고요. 한 작품이 끝날 때까지 반복합니다. (하루 몇 시간 정도 쓰는가요) 3시간 정도 쓰지요. 예전에는 밤샘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안되더라. 3시간 정도 작업하면 탈진해 버리고, 1주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하루는 쉬어줘야 해요.”
―앞으로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나이가 많아 그냥 죽는 날까지 작품을 쓸 거예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하지 않고, 어떤 작가로 기억되든 상관없이 열심히 쓰다가 죽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요. 요즘은 원고를 넘긴 뒤 시간이 조금 있어 『새남소리』를 40년 만에 전면 개작하고 있고요. 전통음악을 다룬 장편의 번역도 서두르고 있어요. 한국의 전통예술이나 전통 미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외국에 소개된 적이 없거든요. 1980년대 연재한 「명인명창을 찾아서」도 책으로 꾸리고 싶어요.”
‘지켜보는 젊은 작가가 있느냐, 한국문학에 대해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불만이 있다”고 답했다. 이순신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조선의 장래를 염려했지만, 그는 한산도에서 한국문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 불만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김경욱, 박형서, 「무용지물 박물관」의 김중혁, 좀더 아래의 정지돈이나 박상영, 배명훈 등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시류를 좀 타는 것 같아요. 최근 제가 계간지 『작가와 사회』에서 대담을 했는데, 문학작품을 ‘인류의 정신이 빚어낸 보석들’이라고 했어요. 이러한 정의에 비하면 우리 작가들이 가볍고 너무 일상에만 매몰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언젠가 소설가 김훈도 한국문학이 너무 ‘미니멀리즘’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문학을 걱정하는 그의 이야기는 어느새 한 자락의 소리가 돼 가고 있었다. 비루한 나의 글은 그 소리에 맞는 추임새나 될 수 있을지. “우리나라 작가들은 한국전쟁 이야기도 구닥다리라고 싫어하지만, 오르한 파묵은 15, 16세기 이야기를 썼고 중국의 모옌도 『붉은 수수밭』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써야 인류정신이 빚어낸 보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 우리나라 작가는 이런 걸 쓰지 않아요. 독자들이 왜 한국문학을 떠났느냐 하면 읽을 만한 작품이 없기 때문입니다.”(2021.2.12)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 유익서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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