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맞은 노숙인들 "코로나 감염될까 떡국 나눔도 피해요"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추운 날씨까지 겹쳐
서울시 인권위, "위생 시설 갖춘 독립 주거 제공해야"
"배는 고팠지만 떡국은 안 받았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사람들이 엄청나게 나와서 줄 서 있는데 코로나19 무서워서 어떻게 받겠어요."
8일 서울역 인근 무료급식소인 '따스한 채움터'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온 유모(64)씨는 지난 주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속마음을 쏟아냈다.
이틀 전인 6일 점심 무렵 서울역 광장에 한 교회 관계자들이 떡국을 나누기 위해 떡, 파, 김치 등을 가득 들고 나타났다. 서울역 인근 일부 노숙인들은 여느 때처럼 줄을 선 채 기다렸다. 하지만 또 다른 노숙인들은 "지금 상황에서 (음식을 나누는 건) 위험하다"고 관계자들에게 항의했다.
설을 앞둔 노숙인들이 '새해 복'을 바라는 마음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에 대한 걱정이 더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지난달 17일 서울역 인근 노숙인 이용시설(서울특별시립다시서기 서울역희망지원센터)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왔고, 노숙인 집단 감염으로 이어졌다.
11일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해당 시설 관련 코로나19 확진자는 91명에 달한다. 방역 당국이 수도권, 대도시의 노숙인, 쪽방 거주자, 시설 종사자 7,6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선제 검사에서도 2일 기준 98명이 양성으로 확인됐다.
'코로나19 검사 결과지' 없으면 식사도 어려워
유씨는 답답한 심정이다. 현재 공공 무료급식소, 샤워시설 등 노숙인 등 대상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1주일 이내 발급된 '코로나19 검사 결과 확인서'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를 받아야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검사 안 받고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는 사람도 많고요"라고 말하는 유씨의 곁으로 '코로나19 음성 확인증'이 없어 무료급식소에서 출입을 거절당한 노숙인 동료가 빵과 우유만 받아든 채 지나갔다.
휴대 전화가 없는 노숙인은 노숙인 시설에서 검사 의뢰서를 받아 코로나19 검사를 한 뒤 결과가 나올 때쯤 시설을 직접 찾아가 이름이 불리길 기다려야 한다.
유씨도 휴대폰이 없어 매주 시설에서 검사 의뢰서를 받은 다음 중구 임시 선별검사소로 향한다. 1일 발급된 검사 확인증을 가지고 있는 유씨가 9일부터 무료 급식소에 들어가기 위해선 갱신된 또 다른 확인증이 필요하다.
유씨는 "어제(7일) 검사받은 거는 아직까지 결과를 못 받았다"며 "내일까지 못 받으면 내일부터는 밥을 못 먹는다"고 초조해했다.
8일 서울특별시립다시서기 서울역희망지원센터 문 앞에는 "2월 6일 이후 (코로나19 검사) 결과는 중구보건소가 통보하지 않아 결과지 발급이 불가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지금 시스템대로면 결과지 발급이 늦어져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없는 노숙인의 경우 어떤 서비스도 이용하지 못한 채 거리에 '고립' 된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1주일 이내 음성 확인자만 출입 가능 조치는) 코로나19 검사를 장려하려는 목적"이라며 "이용하시는 분과 다른 동료 노숙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라고 설명했다.
노숙인인권운동단체 홈리스행동 관계자는 "머물 공간(주거)이 없는 이들에게 복지 서비스 이용을 대가로 주기적으로 코로나19 검사를 받도록 요구하는 건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라며 "당사자(노숙인)들이 상당히 피로할 수밖에 없고 얼마나 견딜 수 있는 일인가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밀접 접촉자 중 컨테이너에 한참 격리된 경우도 있어"
코로나19에 감염되거나 밀접접촉자로 분류된 노숙인들은 어디에 있을까.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확진자는 중증도에 따라 병원이나 생활치료센터로 가고 밀접접촉자는 임시생활시설인 호텔에 머물게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집단감염 초기 화장실도 없는 컨테이너에 확진자와 밀접 접촉자로 분류된 노숙인을 격리 수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 관계자는 "현재는 (컨테이너를) 병원이나 생활치료센터로 가기 전에 잠깐 대기하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장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홈리스행동 관계자는 "희망터 컨테이너 옆 작은 컨테이너에는 대기자 외에도 여전히 밀접접촉자로 분류, 격리된 사람들이 있다"며 "최근 내부에 간이 화장실이 설치됐고, 밀접 접촉자 수에 따라 (컨테이너 격리 여부가) 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시 인권위원회는 앞서 2일 긴급성명을 통해 서울시가 "한정된 예산과 시설, 인력으로 인한 제약 상황에도 능력이 닿는 범위까지 나름의 유의미한 조치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서울시의 이 같은 조치 및 방침이 방역뿐 아니라 노숙인들의 건강권 및 주거권 보호에 미흡하다고 보아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서울시 인권위원회는 서울특별시 인권기본조례 제14조에 따라 서울시가 시민의 인권에 영향을 미치는 법규·정책에 대한 자문을 하기 위해 구성한 기구다. 교수, 변호사, 인권단체 활동가 등 인권 전문가 15인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 죽으면 '노숙자 하나 죽었네' 하겠죠"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응급 잠자리에서) 내쫓아야지. 다시서기센터 가니까 침낭 하나 주면서 그냥 가래요. 우리가 죽으면 아무도 신경도 안 써요. '노숙자 하나 죽었네' 하겠죠"
이번 겨울 '노숙인 응급잠자리'를 이용했던 최모(49)씨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10일간 생활치료센터에 머문 뒤 7일 퇴소했다. 퇴소 후 최씨는 코로나19 감염 위협으로 운영이 중단된 서울역 인근 응급잠자리 근처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울시가 해마다 거리 노숙인 혹한기 대책으로 운영하는 노숙인 응급잠자리는 많게는 수십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잠자리와 위생 시설을 공유하는 밀집시설이다.
서울시는 코로나19 확산이 진행 중인 이번 겨울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제로 노숙인 응급잠자리를 운영했다. 서울시는 17일 노숙인 시설에서 첫 확진자가 발생한지 2일 뒤인 19일에도 보도자료를 통해 "노숙인 응급잠자리 855개 운영해 한파 대비 거처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추위'와 '코로나19 감염 위협'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거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또 서울시가 집단 확산 초기에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밀접접촉자들을 745개 응급잠자리에 수용하면서 감염 확산을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홈리스행동 관계자는 "홈리스 당사자 중 한 분은 가는 응급잠자리마다 확진자가 생기는 바람에 5일 사이에 3차례나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고 전했다.
서울시는 노숙인 응급잠자리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감염 위협이 확산되자 지난달 25일 서울역 일대 응급잠자리 3곳을 폐쇄한 뒤 같은달 30일 다시 운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후에도 응급잠자리의 방역 안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돼 10일 다시 문을 닫았다. 응급잠자리에서 추위를 피하던 노숙인들은 운영중단 이후 임시주거지 제공 등의 적절한 대책 미비로 현재 한파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다.
최씨의 동료는 "응급잠자리 닫으니까 갈 데가 없어요. 여기 냉골인데 이거(침낭) 하나 덮고 한번 자 보세요. 진짜 죽어요. 술 안 먹으면 진짜 못 자요. 얼어 죽어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8일) 서울 최저기온은 영하 6도까지 떨어졌다.
"위생시설 갖춘 독립 주거 제공해야 확산 막을 수 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물리적 거리 두기, 자가 격리, 검역 및 기타 보건 권장 사항을 준수할 수 있도록 응급 숙소를 보장해야 한다. 응급 숙소 거주자는 사생활을 보장받고, 물·위생, 식품, 사회적·정신적 지원, 보건 서비스, 코로나19 검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2020년 4월 UN 주거권특별보고관 발표 ‘홈리스 보호를 위한 코로나19 지침(COVID-19 Guidance Note: Protecting those living in homelessness)'
서울시 인권위원회와 보건의료단체연합, 전국 22개 인권운동단체 등 여러 단체들은 입을 모아 "정부 방역지침을 수행할 수 있는 '위생시설이 갖춰진 독립된 주거'를 제공해야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거리 노숙인·노숙위기 계층에게 고시원 등의 월세를 지원(최장 6개월)하는 서울시 '노숙인 임시주거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민간 숙박시설이나 서울유스호스텔 등 서울시 소유 건물을 사용해 노숙인을 분산시켜 감염 위협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한시적으로, 꼭 필요한 노숙인 대상으로 화장실이 딸린 방을 먼저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서울역 노숙인들도 코로나19를 함께 견디고 있다. 거리에서 머무는 24시간 내내 귀에 상처가 날 때까지 마스크를 쓰고 밥을 먹기 위해 일주일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는다. 유씨는 "노가다(공사현장 노동) 일자리가 완전히 없어져서 애로 사항이 많다"고 털어놨다.
자신을 '서울역 어쎈저'라고 소개한 한 거리 노숙인은 서울역 광장에 손으로 직접 쓴 "코로나19 함께 이겨내요. 화이팅!", "조금 떨어져서 얘기해요", "2m 거리 간격 유지", "5인 이상 모임 자제" 등의 안내문을 내걸었다.
어쩌다 안내문을 작성하게 됐는지 묻자 그는 "코로나19로 다들 고생하는 상황에서 서로 (마스크 착용, 거리두기 등 방역지침 준수를) 잘 해보자는 의미로 적었다"고 답했다.
서울역 인근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홍모(46)씨도 "설이면 홈리스행동 사무실이 있는 '아랫마을'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거나 서울역 광장에서 사람들과 놀았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며 "코로나19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역은 서울역 노숙인들이 누구보다 오랜 시간동안 머무는 공간인 동시에 설 연휴를 맞은 시민들이 전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다.
코로나19 감염을 줄여나가기 위한 방역당국과 서울시의 노력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은기 인턴기자 mate5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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