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낙태죄.. 8년 전 낙태시술한 의사도 '무죄'

최나실 2021. 2. 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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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따라
대법, 1·2심 유죄 선고유예 파기해 무죄 선고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존치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는 인공 임신중절(낙태)을 조건 없이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지난해 10월 7일, 서울 마포구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실에 낙태죄 폐지 관련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스1
형법 제269조 제1항, 제270조 제1항 중 '의사(醫師)'에 관한 부분은 모두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 위 조항들은 2020년 12월 31일을 시한으로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2017헌바127)

올해 1월 1일부터 대한민국에서 낙태죄는 사라졌다. 지난 2019년 4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결과다. 당시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을 낙태죄 폐지 및 개정안을 마련할 데드라인으로 제시했으나, 결국 국회가 대체 입법을 못 하면서 현재는 낙태죄의 효력만 상실된 상태다. 이러한 ‘낙태죄 입법 공백’ 상황에서 최근 대법원이 8년 전 인공 임신중절(낙태) 수술을 했던 의사에게 하급심 판단을 뒤집고, 무죄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지난달 업무상촉탁낙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산부인과 의사 A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파기자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고 12일 밝혔다. 1·2심에서 A씨는 징역 6월과 자격정지 1년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선고유예란 법적으로 유죄는 인정되지만 죄질이 가벼울 경우 일단 처벌하지 않고, 별다른 문제 없이 일정 기간(2년)을 보내면 선고 자체를 면해 주는 제도다.

산부인과 원장인 A씨는 2013년 9월, 당시 임신 5주차였던 B씨 요청에 따라 낙태 시술을 해 준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미혼인 B씨는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뜻하지 않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자, ‘그동안 복용했던 술과 수면제 탓에 기형아 출산이 우려된다’며 낙태 수술을 문의했다. A씨는 B씨와의 면담에서 “사실 낙태는 불법이다. 다음에 아이가 생기면 그땐 꼭 낳으라”고 말하면서 일단 수술을 해 주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당시 B씨의 임신이 모체의 생명과 건강에 위험을 초래하게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봐 수술을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자보건법상 임신으로 임부(妊婦)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발생할 상황이라면 ‘부득이한 임신중절’로 보고, 낙태죄를 묻지 않는다. 그러나 2017년 1·2심은 당시 B씨의 건강 상태가 그 정도로 위중한 상태는 아니었다며,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 헌재 결정으로 1953년 제정된 형법상 낙태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이는 대법원에 계류돼 있던 A씨 사건에도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대법원은 A씨 무죄 판단 이유에 대해 “헌법재판소법상, 형벌 관련 법률조항에 위헌 결정이 선고된 경우 그 조항은 소급해 효력을 잃는다”며 “형사소송법에 따라 같은 조항이 적용돼 공소가 제기된 사건에서도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 결과, 올해부터 낙태는 더 이상 ‘형법상 범죄’가 아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안전하고 투명한 임신중절 선택권을 보장받는 길은 멀기만 하다. 후속 입법도, 정부 지침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여전히 낙태 수술은 암암리에 이뤄지고, 온라인에선 미허가 낙태약이 의료 전문가 설명 없이 거래되는 게 현실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 사이의 실질적 조화를 위한 사회적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현재 국회에는 정부안을 포함, 총 6건의 낙태죄(형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중 더불어민주당 권인숙·박주민 의원과 정의당 이은주 의원 등이 각각 발의한 개정안은 ‘낙태죄 전면 폐지’가 골자다. 국회에 계류 중인 여러 건의 모자보건법 개정안들에는 △임신중절에 대한 정확한 보건의료 정보·서비스 제공 신설 △약물 투여를 통한 임신중절 방법 허용 △낙태를 고민 중인 여성에 대한 상담 체계 구축 등 제도적 보완책도 다수 담겨 있다.

8년 전, B씨는 남자친구가 인터넷에서 찾아낸 ‘낙태 수술 브로커’를 통해 A씨의 병원을 소개받았었다. B씨는 내원 당일, 별도의 숙려 기간도 없이 초음파 등의 간단한 검사만 받은 채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이후엔 “카드 결제는 안 되고, 현금만 받는다”는 간호사 말에, 방금 막 마취에서 깨어난 몸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가 현금을 추가로 인출한 뒤 다시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낙태죄 조항은 사라졌지만, 거대한 ‘제도 공백’ 상태에 머물러 있는 2021년 오늘날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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