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사람 들어오면 '다른 일 찾아봐'라고 말해요"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기회가 되면 다른 일 찾아봐'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여기서는 5년을 일하고 10년을 일해도 도급업체에서 일하는 상담사고 사람 대접 받으며 일하기 어려웠으니까요."
김숙영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 고객센터지부장은 건보공단 고객센터 12년 차 상담사다. 입사 당시 건보공단으로부터 'J2-09026'이라는 사번을 받았다. 뒤쪽에 적힌 다섯 자리 숫자 중 앞 두 개가 김 지부장의 입사연도다.
김 지부장은 상담사로 일하면서 건강보험과 관련한 국민의 오해를 풀고 국민의 제도 활용에 필요한 정보를 알리는 일을 했다. 자신의 일이 건보제도의 올바른 운용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러나 김 지부장은 새로 일을 시작한 젊은 사람들에게 이 일을 계속하라고 권하지 못한다고 했다. 저임금 간접고용 노동자로 일하며 겪은 부당한 일과 그로 인해 마음속에 쌓인 설움 때문이었다.
지난 1일 김 지부장과 같은 처지에 있는 1000여 명의 상담사가 건보공단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지난 8일, 원주에 있는 건보공단 본부 인근 카페에서 김 지부장을 만나 상담사들이 파업을 한 이유를 들어보았다.
김 지부장은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들이 그간 겪은 부당한 일과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를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로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정규직이 하던 상담 업무, 도급업체로 넘긴 건보공단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의 주 업무는 건보공단으로 걸려오는 상담 전화에 응하고 민원을 처리하는 것이다.
애초 이 업무는 건보공단 정규직 직원들이 매일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하던 업무였다. 정규직 직원의 불만이 늘자 건보공단은 2006년부터 고객센터 업무를 도급업체에 위탁하기 시작했다. 현재 건보공단은 11개 민간 업체에 전국 12개 고객센터 업무를 도급하고 있다.
공단 직원이 수행하던 업무를 하는 만큼 상담사에게도 그에 준하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김 지부장은 책으로 세 권 분량의 교육 자료를 받고 매일 시험을 봐가며 4주간 교육을 받았다. 김 지부장은 "교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그만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교육을 받았다고 곧바로 능숙하게 상담 업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건강보험에는 국민 모두가 가입돼 있다. 그러다 보니 상담사들은 각양각색의 다양한 민원을 접한다. 김 지부장은 "보통 일에 익숙해지려면 3년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실제 김 지부장과 통화한 민원인은 다양했다. 건보에 가입된 줄도 몰랐는데 체납금이 쌓인 사람, 급식실에 채소를 공급하다 코로나로 일감이 끊겼는데 2년 전 소득을 기준으로 부과된 건보료를 내야 하는 40대 가장, 건강검진 문자를 받았는데 '내가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묻는 어르신 등이었다.
상담 중 민원인의 주민등록번호 입력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개인정보도 엄청나게 다양했다. 상담사는 재산, 소득, 가족관계, 직장, 출입국기록 등 한 개인의 거의 모든 개인정보를 볼 수 있다. 김 지부장은 "경찰이 사건을 수사할 때 개인정보와 관련해 협조 요청을 해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저임금, 감정노동, 속도 경쟁...건보공단 상담사의 일
감정노동도 상당했다. 건강보험 업무는 법과 규정에 따라 이뤄진다. 상담사의 재량 범위가 넓지 않다. '보험료가 너무 많이 오른 거 아니냐'는 민원이 접수되었다고 상담사가 이를 깎아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왜 올랐는지를 설명하는 것뿐이다. 그래도 민원인의 불만이 이어지면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때로는 '상담사가 뭘 안다고 그러냐'며 '공단 직원을 바꾸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공단 직원에게 전화를 바꿔주기도 어렵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안내해도 똑같은 걸 왜 연결하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 명의 상담사가 하루 동안 공단 직원에게 연결할 수 있는 통화 수가 두 통으로 제한되어 있기도 하다.
도급업체가 민원인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정확하고 자세한 상담보다는 빠른 상담을 원한다는 것도 상담사들에게는 스트레스이자 일의 보람을 깎는 요인이다.
건보공단 도급업체가 상담 전화 한 통을 받는데 책정하는 기준 시간은 3분이다. 5분이 넘어가면 팀장이 직접 통화 내용을 듣기 시작한다. 통화 시간이 7분을 넘기면 상담사가 보고 있는 컴퓨터 화면으로 전화를 끊으라는 팀장의 채팅이 올라온다. 김 지부장은 "상담을 듣다 보면 더 자세하게 안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일 못하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이에 더해 도급업체는 상담 전화 건수가 많은 상담사에게 성과급을 준다. 이때 상담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김 지부장은 "상담사가 받는 전화가 하루 평균 120통 정도인데 하루 만에 300통의 상담을 하는 상담사를 본 적도 있다. '제대로 안내를 하는 건가' 생각했다"며 "지금처럼 상담 속도를 중시하는 운영은 민원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상담사들이 겪은 공단과 업체의 갑질
감정노동, 속도 경쟁에 지친 상담사를 더 힘들게 하는 건 건보공단과 도급업체가 그들에게 사람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담사에 대한 불만이 사이버 민원으로 접수되면 "인민재판하듯" 모든 상담사가 보는 앞에서 녹취를 들려줬다. 신입 상담사가 일을 잘 못하면 관리자들이 큰소리로 혼을 냈다. 김 지부장은 '너무 한다'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까 겁이 나 '그러지 말라'고 말 한 마디 못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되지 않았다. 김 지부장은 관리자가 하혈을 하는 동료를 집에 보내주지 않은 적이 있다고 했다. 연차를 쓸 때도 늘 관리자의 눈치를 봐야 했다. 퇴근 중 뇌혈관이 터졌는데 산재 신청도 못하고 퇴사한 상담사도 있었다.
한번은 안산에 고객센터를 새로 만들며 수원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를 배치한 일이 있었다. 당장 숙련된 상담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공단과 업체는 수원에서 일하던 상담사에게 셔틀버스를 제공했다. 몇 년 뒤 안산 고객센터가 안착하자 셔틀버스가 없어졌다. 20여 분 걸리던 출근 시간이 1시간 30분까지 늘었다. 상담사들이 불만을 제기했지만 공단과 업체는 셔틀버스를 되살리지 않았다.
김 지부장은 "공단과 업체는 대놓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다른 데도 다 똑같다. 여기 아니면 어디 가서 일할 거냐'는 식으로 상담사를 대해왔다"며 "실제로 많은 상담사가 이런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뒀다. 제 입사 동기 130여 명 중에서도 7명만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조 만든 뒤 많은 것이 변했지만...간접고용으로는 처우 개선에 한계"
참다못한 상담사들이 2019년 12월 노조를 만들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이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도 계기가 됐다. 김 지부장은 노조를 만들고 조합원들에게 "이제는 절을 바꿀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후 관리자들의 비인격적 대우는 사라졌다. 상담사들이 관리자의 눈치를 보느라 연차를 못 쓰는 일도 상당 부분 없어졌다. 현재 공공운수노조 건보공단 고객센터지부 조합원 수는 1000여 명까지 불어있다.
하지만 아직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 자리가 좋은 일자리가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의 임금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다. 사라진 수원-안산 간 셔틀버스도 다시 생기지 않았다. 김 지부장은 "교섭에서 처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도급업체가 이미 확정된 계약서가 있어 어렵다는 말을 했다"며 "간접고용 상태에서는 상담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노조 활동을 하며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간접고용 노동자 대부분이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와 비슷한 일을 겪는다. 법적으로 파견업체 혹은 하청업체 소속인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인건비를 책정하는 원청을 상대로 처우 개선을 요구하지 못한다. '진짜 사장'과 노동자 사이의 교섭을 막는 간접고용은 한국사회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제도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간접고용 노동자를 직접고용하는 데 대한 따가운 시선이 있다. 인터뷰 말미 김 지부장에게 이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김 지부장은 '건보공단 고객센터 상담사를 부당하게 마음 상하는 일 없이 생계를 꾸리는데 어려움 없는 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일자리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꺼냈다.
김 지부장은 "'공공기관 정규직'같은 좋은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사람이 많지만 모두가 그 자리로 입사할 수는 없다"며 "저희 상담사들도 건보공단 일반직 직원과 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건 아니다"는 단서를 달았다.
김 지부장은 "열심히 준비했지만 '좋은 일자리'로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적정한 일자리가 제공돼야 한다"며 "저희 상담사들이 하는 것처럼 직접고용 일자리를 늘리려는 시도를 선택 가능한 일자리의 폭을 넓히려는 움직임으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파업이 끝나면, 김 지부장은 고객센터에서 새로 일을 시작한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 같이 한 번 열심히 일해보자'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할 권한을 갖고 있는 건보공단은 상담사들의 요구에 아직 답이 없다.
[최용락 기자(ama@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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