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우의 아무튼 인터뷰] '현타' 온 조선일보 기자, 노숙자 만나 행복을 묻다

최원우 기자 2021. 2. 1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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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어느덧 기자 생활 9년차. 이대로 살면 행복할까 스스로 물었지만,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힘들었습니다. 잘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오히려 행복은 멀어져만 가는 게 아닐까 불안했습니다. 주변에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뭘까에 대해 제 방식대로 탐색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진부한 주제라는 걸 압니다. 그 단어만 봐도 ‘뒤로가기’ 버튼에 손이 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같이 고민하고 싶었습니다.

날이 제법 쌀쌀했던 지난달 25일 이른 아침. 무턱대고 서울역을 향했다. 잘살고 싶을 때 죽음을 떠올리듯, 행복을 이야기 하려고 보니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서 실마리를 찾고 싶었다. 가족도, 집도 없는 노숙자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설날이 다가오지만 돌아갈 가족이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과연 행복할지, 아니면 그저 불행을 견디고만 있는 걸지 궁금했다.

지난달 25일 서울역 앞에 나와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이다. 노숙자는 한자로 풀어보면 '이슬을 맞으며 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최원우 기자

처음엔 추위 때문에 밖에 노숙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걱정했다. 한 명도 못 만날까 봐. 다행인지 불행인지 역 앞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바로 노숙자’라는 느낌으로 서성이는 무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직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아침부터 술판을 벌인 사람들도 있었다. 노숙자는 한자로 길 로(路) 자가 아니라 이슬 로(露) 자를 쓴다. ‘이슬을 맞으며 자는 사람’이라는 제법 운치 있는 표현을 쓴다. 적어도 참이슬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고백한다. 말 걸기가 조금은 무서웠다. 괜히 시비를 걸거나 묻지 마 폭행을 가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코로나가 제일 무서웠다. 집을 나서기 전 아내는 “마스크 고무줄을 한번 꼬아서 꽉 끼우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면서 휴대용 세정제를 손에 꼭 쥐어줬다. 마침 서울역 앞에는 선별진료소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리 칸막이 안쪽에서 방호복으로 싸맨 손만 내놓은 의사가 코로나 진단기를 내 코 깊숙이 찌르면서 “아플수록 검사가 정확해진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런 불안을 무릅쓰고 노숙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의미가 있을까 긴가민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른 아침 서울역에서 나오는 인파가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지만, 한 노숙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잠을 청하고 있다./최원우 기자

1시간 정도는 서성이면서 눈치만 봤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작해서 충정로 방향 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노숙자 대피소가 나온다. 그 옆에는 노숙자 전용 호텔 격인 지하도가 있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하도 천장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일부 노숙자들이 물웅덩이를 피해 몸을 누이고 있었다. 전날 밤 술 파티를 벌인 양 소주병, 맥주캔, 먹다 남은 햄버거, 바나나 껍질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서울역 안 휴게 의자에도 노숙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요즘 노숙자들은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도 많다. 인상착의로는 노숙자가 분명했는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아무튼 인터뷰 대상을 찾기 위해 이 거점들을 서너 번 돌았다.

더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나마 행색이 말끔해 보이는 한 노숙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봤다. 어쩌다 노숙 생활을 시작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예상은 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찍은 사람 모두 인터뷰를 거부했다. 네 번째로 말을 건 노숙자는 “저기 저 사람은 말을 해줄지도 모른다”면서 한 사람을 지목했다. 그마저 고마운 반응이었다. 노숙자가 지목한 노숙자에게 다가갔더니 마스크 너머로 강한 알코올 냄새가 전해졌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한 터였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한참 얘기하던 노숙자가 다리가 아팠는지 길바닥에 앉았다. 나도 따라 앉았다. 노숙자 체험 기사를 쓰려던 건 아니었는데, 남들 눈에는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 같다. 그렇게 다시 30분쯤 지나자 다른 노숙자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조금씩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했다는 사람, 사업이 망해서 왔다는 사람, ‘노가다'(막노동) 뛰다가 다쳐서 나왔다는 사람 저마다 사연이 참 많았다.

◇한때 명문대 나와 대기업 다녔지만··· 아내 불륜 계기로 사는 의미 잃고 길거리로

"서울역에 나만큼 기구한 사람은 없다"며 인터뷰를 자청하고 나선 노숙자 김노숙(가명)씨의 뒷모습이다. 형광빛 초록 조끼가 '시선 강탈'이었다./최원우 기자

그때 형광빛 초록 조끼를 해병대 전투복 위에 입은 한 노숙자가 나타났다. 그는 “내가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노숙자다. 여기서 나만큼 기구한 사연도 없을 거다”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더니 그는 “인터뷰를 하려면 마스크를 써야겠다”면서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 썼다.

58년생이라는 김노숙(가명)씨는 어디까지 다 믿어야 할지 모를 사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거의 2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했는데 마치 오랫동안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사람처럼, 한꺼번에 말을 쏟아냈다. 중간 중간 횡설수설이 많기는 했지만, 일관된 요지로 말을 이어갔다.

- 어떻게 노숙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사람을 죽였어요. 15년 살다 나와서 20년 넘게 여기서 보내고 있습니다.”

- 사람을 죽였다고요?

“아내가 바람을 피웠어요. 바람 난 남자를 제가 죽였습니다.”

- 선뜻 믿기 힘든데요.

“나름 명문대 영문과를 나와서 당시로 치면 대기업에 들어가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큰 건어물 가게를 했습니다. 결혼은 강원도에서 큰 사업을 하는 집안 여식을 만났어요.(실제로 그는 한 손에 영자신문을 들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 출장이 잦아서 집을 자주 비웠는데 아내가 바람이 난 거에요.”

- 어떻게 그런 일이.

“결혼하고 3년째였어요. 딸 하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동네에 아내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아요. 그땐 돈을 잘 벌 때라 흥신소를 고용해서 아내 뒷조사를 했어요. 그러다 호텔에서 불륜 현장을 바로 잡아냈습니다. 이성을 잃고 불륜남을 죽였어요. 아내도 죽이고 싶었는데, 두 자식이 생각나서 차마 못 죽이겠더라고요. 그냥 가라고 했더니 아내가 ‘여보, 고마워요’ 그러대요.”

김노숙씨가 손에 쥐고 있던 영자 신문. 정말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 맞는지는 솔직히 의심쩍었다./최원우 기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김씨는 자신이 어떻게 흥신소를 동원해 둘을 찾아냈고 어떻게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됐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후 김씨는 자수하고 교도소에서 15년을 복역했다고 한다. 20년형이었는데, 모범수로 지내면서 5년 일찍 나왔다는 것이다. 출소하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술이었다. 그가 복역 중에 아내가 재산을 대부분 빼돌려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내가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김씨는 “출소하고부터 매일 술만 마셨다. 애들은 처가에 맡겨두고 연락을 끊었다. 아이들한테 ‘아빠는 해외로 이민 가서 잘 산다’는 편지만 한 통 남겼다”고 했다. 김씨는 세 차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정신병원에 한동안 입원했다가 돈이 없어서 쫓겨났다고 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이라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에게 손톱만한 행복이라도 남아있을까.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그냥 여기저기 떠돌면서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역에서 TV도 보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정부나 민간단체들이 마련한 노숙자 쉼터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거기는 너무 냄새가 나서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일을 해서 집을 구할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뉴스 안 봐요? 요즘 집값이 얼만데 노가다 뛰어서 제대로 된 집 구하겠느냐”고 했다.

조심스럽게 “이런 삶이 행복하냐”고 물었다. 김씨는 “괴롭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춤을 출 때 제일 행복하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그래도 내가 언제 행복한지 알아요. 춤을 출 때 행복합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안 오지만, 전에는 주말마다 교회 사람들이 찾아와서 야외 예배를 열었어요. 그때 찬송가에 맞춰 춤을 췄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코로나가 빨리 멈춰서 예배를 하러 왔으면 좋겠네요.”

거리에 노숙하는 와중에도 춤을 출 때 행복하다는 그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춤을 출 때 행복했다”

김씨가 행복을 느낀다는 춤사위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다음날 오후 3시쯤 서울역으로 다시 김씨를 찾아갔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지만, 왠지 처음 만났던 곳 주변에서 김씨를 쉽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을 찾아봐도 김씨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오후 5시쯤 지하도에 잠자리를 맡으러 간다던 김씨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1시간쯤 광장을 맴돌다가 다리가 아파서 서울역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 의자는 이미 노숙자들 차지였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자리를 하나 잡아 앉았다. 다시 1시간쯤 더 지났을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익숙한 형광색 조끼가 눈에 들어왔다. 김씨였다. 산삼이라도 발견한 기분이었다.

김씨에게 인사를 건네자 “다시 보니까 반갑네요”라고 했다. 김씨는 수원에서 국수를 무료로 배식하는 교회에 다녀왔다고 했다. 요일별로 수도권 곳곳에 무료 배식소를 찾아 여행 다닌다는 생각으로 돌아다닐 때가 있다고 한다. 무턱대고 김씨가 행복을 느낀다던 춤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잠시 뭐 이런 걸 시키느냐는 눈빛을 보내던 김씨는 “음악이 있어야 춤이 나오는데···”라고 했다. 노트북으로 원하는 노래를 틀어주겠다고 했다. 발걸음을 옮겨 인적이 좀 드문 곳으로 향했다. 김씨는 " ‘내 나이가 어때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혹시 틀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김노숙씨가 가수 오승근이 부른 '내 나이가 어때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박자를 거의 무시한 마이웨이 막춤이었지만, 김씨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신명난 모습이다./최원우 기자

소녀 감성 가사가 뽕짝 리듬에 어우러져 나오는 노래다. 노래를 틀었더니 김씨는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신나게 춤을 췄다. 김씨는 “정말이지 춤을 출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요일별로 무료 배식하는 곳들이 있다. 염치는 없지만, 밥 굶을 일은 없다”고 했다. 김씨는 염치를 얘기했다.

“어쨌든 이런 생활이 마음은 편해서 계속 이어가는 것 같아요. 지나간 원망도, 증오도 세월 속에 흘러가 버렸어요. 두 자식이 그리운 것만 빼면 괜찮아요. 코로나가 진정돼서 야외 예배나 다시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원 없이 춤출 수 있으니까.”

큰 죄를 짓고 한 몸 누일 집도 없이 떠도는 삶. 아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자녀 앞에 떳떳이 설 수 없어 평생을 그리워만 하는 신세. 그래도 김씨는 하루하루 살고 있다.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식사 주는 곳을 찾아다니고, 옷도 빨아 입고, 아프면 병원도 간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뭘 좋아하고 언제 행복한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김씨의 삶은 부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세 끼를 얻어먹고, 노숙하는 남루한 인생이다. 하지만 손에 쥔 게 하나도 없는 지금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보통의 인생은 행복해야 할 이유가 더 많지 않을까. 마스크로 가려지지 않은 눈웃음을 짓던 김씨의 춤사위는 “진정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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