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금지 명령받고도 아내 집 찾아가 휘발유 끼얹고 불붙인 남편
가해자에 피해자 주소 노출하는 접근금지 맹점 여전..
전문가 "범죄 억제력 높이는 보완 필요"
지난해 5월 31일 오후 9시, 대구 한 주유소에 50대 남성 A씨(53)가 찾아왔다. 화물차에서 내린 A씨는 500mL짜리 생수통 4개를 꺼내 휘발유를 가득 채운 뒤 차를 몰고 떠났다. 목적지는 별거 중인 아내 B씨(48)와 아들 C군(19)이 살고 있는 집. A씨는 2주 전쯤 법원으로부터 이 집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았다.
◇아내에게 휘발유 끼얹고 불붙인 남편
결혼 26년째인 A씨 부부는 평소 가정 경제와 아들 교육 문제로 자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A씨가 아내 B씨 머리와 이마를 때리는 등 폭행을 일삼으면서 부부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법원은 A씨에게 벌금 70만원을 선고하고, 아내 주거지와 직장 반경 100m 이내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아들과 함께 집을 나와 따로 살게 된 B씨 거처가 A씨에게 노출됐다. 현행법상 접근 금지 명령은 장소를 기준으로 반경 100m 이내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해자에게 피해자 거주지나 직장 위치가 알려질 수밖에 없다.
31일 오후 9시 44분. A씨는 대구 북구의 B씨 집 앞에서 아내 B씨를 기다렸다. A씨는 휘발유가 담긴 생수통 4개를 상의와 바지 주머니에 넣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B씨를 뒤를 쫓았다. B씨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A씨가 따라 들어갔다. A씨는 법정에서 휘발유를 준비해 아내를 찾아간 이유에 대해 “(아내가) 이혼 소송을 준비한다기에 겁을 줘서 마음을 돌리고, 내 말을 안 들으면 불을 질러 함께 죽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놀란 B씨는 곧바로 아들 C군에게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C군이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자 A씨는 “너 그러면 우리 다 죽는다”고 소리친 뒤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휘발유를 뿌렸다. 이어 또 다른 생수통을 꺼내 휘발유를 아내 머리에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A씨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B씨 몸에 붙은 불은 아들 C군과 소란을 듣고 달려온 이웃 주민들이 껐다. 불을 끄는 과정에서 C군에게 불이 옮겨 붙었다. B씨와 C군 모두 머리와 목에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대구 강북경찰서는 이날 A씨를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했다.
지난 5일 대구지법 형사 12부(재판장 이진관)는 A씨에게 징역 6년 형을 선고했다. 이와 함께 10년간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재판부는 “가족들이 받은 육체적, 정신적 피해가 큰 데도 피고인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고 변명을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피고인은 가장으로서 피해자들을 부양해왔고 피해자들과 원만히 합의했으며, 피해자들 역시 법원에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는 점을 들어 양형 사유를 밝혔다.
◇”접근금지명령, 실질적인 보호 능력을 높여야”
접근 금지 명령 등 긴급 임시조치를 위반하고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는 해마다 늘고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긴급 임시조치 위반으로 인한 검거 건수는 지난 2016년 27건에서 지난해 124건으로 5년간 4.6배로 늘었다.
정부가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개정해 올해부터는 접근 금지 등 임시조치를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에 처한다. 이전까지는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부과했다.
전문가들은 사전에 범죄를 막을 수 있는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린다 해도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는 의미가 없다”면서 “미국의 PPO(Personal Protection Order·개인보호명령)처럼 피해자를 지킬 수 있는 사실적인 경찰 공권력 행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경인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가정 폭력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보호 능력을 높이도록 접근 금지 명령에 대해 다양한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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