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공정 사이.. 백신여권 도입 논란

유태영 2021. 2. 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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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P연합뉴스
그랜트 섑스 영국 교통부 장관은 지난 10일(현지시간)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백신 여권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외 출국 시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체계와 관련해 이미 싱가포르, 미국 등과 대화를 시작했다는 설명이었다. 이는 앞서 나딤 자하위 영국 백신 담당 정무차관이 백신 여권은 “차별적”이 될 수 있다며 도입 논의에 선을 그은 것과는 정반대되는 언급이었다.

현재 전 세계 각국에서 백신 여권 도입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백신 여권이 과학적·윤리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백신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접종률이 국가별로 천차만별인 데다 한 나라 국민 사이에서도 ‘백신을 맞았다는 이유로 특권을 부여받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문제제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백신 여권’이란

백신 여권에 관한 아이디어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받았다는 것을 간편하게 인증하는 개념으로 제기됐다. 과거 세계보건기구(WHO)는 예방접종 이력을 기록한 ‘국제접종증명서’를 승인한 바 있는데, 이것의 최신 버전으로 볼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통신은 “코로나19의 확산세와 파괴력을 고려할 때 보다 현대적이고 안전한 디지털 기록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많은 이들이 제시하고 있다”며 “이상적으로 볼 때,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했다는 증거를 제공하고 최근의 진단검사 결과를 문서화해 국경 요원이나 동료 여행객, 같은 행사 참가자 등을 보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 정계·산업계 지도자들은 국가가 발급하는 백신 여권이 코로나19 이전의 자유로운 일상을 되찾는 방법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민간 회사들이 비행기나 여객선 탑승, 콘서트 관람 등을 원하는 사람에게 백신 여권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 중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독일 티켓 회사 이벤팀은 고객들이 백신을 맞았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온라인 예약 시스템을 이미 개편했다. 가브리엘레 그라비나 이탈리아 축구연맹 회장은 최근 과학계 인사들을 만나 백신 2회분 접종을 모두 마친 서포터들에 한해 관중석 입장을 허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유로 2021이나 도쿄 올림픽 같은 주요 스포츠 행사 추진 과정에서 백신 여권 도입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될 수도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세계 공통의 백신 접종 인증 문서가 제도화한다면, 코로나19 상황에서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쓰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한 간호사가 아스트라 제네카 백신 접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AP연합뉴스
◆이스라엘·스웨덴 등 적극 추진 “접종률 높이고 경제 활성화”

백신 여권을 국가 정책화하려는 움직임은 이스라엘이 가장 적극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스라엘 관료들은 백신 접종을 마친 사람들이 식당, 극장, 영화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해외여행 시 자가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는 ‘녹색 여권’의 도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런 논의는 백신 접종 장려책으로 시작됐으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으로도 풀이된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백신 여권 도입에 긍정적인 태도다. 덴마크는 디지털 백신 여권 도입 계획을 밝혔고, 스웨덴은 국제 표준이 마련되면 올여름 전에 디지털 백신 여권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스웨덴 디지털부 장관은 “스웨덴과 주변국이 사회를 다시 개방하기 시작할 때, 여행 등을 위해 백신 접종 증명서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스 총리는 백신을 맞은 사람이 ‘여행 패스트트랙’을 이용할 수 있도록 유럽연합(EU) 공통의 백신 인증서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브라질에서는 지난해 12월 대법관 11명 중 10명이 학교, 대중교통, 쇼핑센터, 식당 등 이용을 위해 백신 접종을 의무화할 수 있다는 데 손을 들어줬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백신 접종을 거부할 권리”를 강조했지만, 알렉산드르 드모라에스 대법관은 “우리는 지금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염병과 싸우고 있다”며 이를 일축했다.

지난달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46%만이 ‘백신을 기꺼이 맞겠다’고 답한 홍콩에서도 다음달 시작하는 백신 접종 장려책으로 백신 여권 발급 방안이 제시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 직후 서명한 여러 행정명령 중 하나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디지털 백신 접종 인증서’ 도입의 타당성을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 EPA연합뉴스
◆신중한 독일·프랑스 “불평등한 제도…사회 분열 우려”

하지만 백신 접종이 코로나19 전파력을 감소시키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만큼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전파력이 더 센 것으로 알려진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백신 여권 제도에 대한 법적 논란은 당국을 더욱 골치 아프게 한다.

독일 정부의 독립적 자문기구인 윤리위원회는 백신 접종자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퍼뜨릴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불충분한 데다가, EU 평균 백신 접종률이 2%대에 불과한 상황에서 소수의 접종자에게만 특권을 주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만약 백신을 맞은 특정 집단에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면,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 삶에 과중한 제약을 받았던 요양원 거주자들에 한정돼야 한다고 윤리위는 제안했다.

장 카스텍스 프랑스 총리도 법적 문제 발생 가능성을 이유로 백신 접종 증명서 의무화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클레망 본 프랑스 외교부 유럽담당 국무장관은 아직 백신이 모두에게 제공되지 않은 만큼 백신 여권이 평등이라는 가치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럽에서 백신 캠페인은 이제 막 시작됐다”며 “어떤 사람들(백신 접종자)이 타인에 비해 더 중요한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은 충격적”이라고 했다.

가디언은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 코로나19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보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경제 개방의 속도에서부터 조부모와 손자손녀가 다시 포옹할 수 있는 시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면서도 “그러나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각종 제약이 이미 사회 전반에 팽팽한 긴장을 낳고 있는 상황에서 (백신 여권은) 사회를 더욱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경고음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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