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오페라발레단'에 흑인 무용수를..유럽 무용계에 불어오는 인종평등 바람

이윤정 기자 2021. 2. 1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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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명문 발레학교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사랑하는 작고 예쁜 것들>의 주인공. 넷플릭스 포스터.


“우리는 출신은 따지지 않아. 오직 재능만 보지.”

명문 발레학교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사랑하는 작고 예쁜 것들>(2020)에서 미국 시카고 최고의 발레학교에 장학생으로 뽑힌 흑인 학생에게 교장이 건네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예술계는 ‘재능’만을 볼까. 유럽 궁정 문화에서 출발한 발레 공연은 유독 ‘발레 블랑(백색 발레)’ 기조가 강하다. 2015년 미국을 대표하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발레단이 75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무용수인 미스티 코프랜드를 수석무용수로 세웠지만, 여전히 세계의 유명 발레단에서 흑인 무용수를 주역으로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타임지가 표지모델로 소개했던 ABT 수석무용수 미스티 코프랜드. 타임


■350년 전통 파리오페라, ‘다양성’을 선포하다

그런데 350년 전통의 파리국립오페라 발레단이 ‘다양성’을 개혁의 중심 가치로 내걸었다. 지난 8일(현지시간) 파리오페라 총감독 알렉산더 니프가 발레단, 오케스트라, 발레스쿨의 중심에 더 많은 인종 다양성을 고려하겠다는 개혁안을 발표한 것이다. 프랑스 전역에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 운동이 벌어진 가운데, 파리오페라 또한 예술 속의 인종차별 요소를 들여다보고 시대 흐름에 맞춰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우파들은 “미국식 문화적 검열”이라면서 거센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니프 총감독은 이날 열린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350년 역사의 파리오페라를 개혁하겠다면서 ‘다양성’을 중심 기조로 내걸었다. 이같은 변화는 예견된 것이었다. 지난해 파리오페라 직원들은 내부의 인종 차별 문제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하는 등 프랑스 예술계의 다양성 문제를 제기했다. 캐나다 오페라단 총감독을 맡다가 지난해 가을 계획보다 빨리 파리오페라를 지휘하게 된 니프는 ‘다양성’을 돌아보는 연구를 의뢰했다.

연구 보고서에서 역사학자 팝 은디아예, 인권 전문가 콘스탄스 르비에르 등은 파리오페라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술단 오디션과 발레스쿨 선발 절차 등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과 해외 주요 도시에서도 오디션을 열라고 조언했다. 파리까지 찾아오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재능 있는 학생들을 찾아 파리오페라가 먼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 무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능 있는 무용수가 오디션에서 배제되는 문제에 대한 관심도 촉구했다. 모든 무용수들이 흰색 튀튀를 입고 등장하는 장면이 많은 발레 공연에서 흑인 무용수들은 자주 캐스팅에서 제외되곤 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내외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도 공연 레퍼토리에 인종차별적 요소는 없는지 살필 것을 조언했다. 2015년 공연부터 파리오페라는 일부 역할에서 검은 얼굴 분장을 하던 전통을 없앴고, ‘작은 흑인들의 춤’은 ‘어린이들의 춤’으로 개칭했다. 니프 총감독 또한 최근 르몽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종 차별적 요소가 있는) 일부 작품들은 레퍼토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오페라의 변신을 두고 프랑스 우파 정치인들은 반발하고 있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과 같은 인기 작품들이 변형되거나 아예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예술계의) 반 인종차별이 미쳐버렸다”고 했고, 르몽드의 편집국장 미셸 게린은 “프랑스가 (인종차별) 문제를 피하기 위해 자기 검열의 폭주로 이뤄진 미국 도로를 따라가고 있다”고 했다.

■베를린국립발레단 흑인 여성 무용수도 인종차별 경험

독일 베를린국립발레단의 무용수 클로엘 로페스 고메즈. 인스타그램


예술계의 인종차별 관행은 프랑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일 베를린국립발레단의 첫 흑인 여성 무용수 클로엘 로페스 고메즈 또한 인종차별을 당해왔다고 폭로했다. 프랑스 출신인 고메즈는 2018년 베를린국립발레단 단원으로 입단했지만, “피부색 때문에 배역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고 했다. 발레학교에 다닐 때부터 <백조의 호수> 코르드발레로 나설 땐 백인 무용수처럼 하얀 화장을 강요받았고, <라 바야데르>에서는 하얀 베일을 써야 하는 역할을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유를 물으면 “흑인이라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몇몇 무용 교사는 “흑인의 피부가 아름답지 않다”고 공공연하게 말했고, 백인 무용수들에게 둘러싸인 흑인 무용수를 무대에 세우는 것도 꺼려했다.

고메즈가 차별을 당하는 것을 동료들조차 불편하게 느꼈지만 발레단의 고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불만을 말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발레단 내 인종차별 문제가 이슈가 되자 ABT 수석무용수 코플랜드 뿐만 아니라 파리오페라발레, 영국 로얄발레 등 세계적인 발레단의 응원이 이어졌다. 결국 베를린국립발레단 임시 예술감독 크리스티안 테오발드는 지난해 12월 성명에서 “우리 발레단에서 드러난 인종차별적인 행동은 우리를 깊이 반성하게 만든다”면서 “발레단 내 차별 문제를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고메즈는 “다른 어린 흑인 소녀들에게 흑인 발레리나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기쁘다”고 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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