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안내견 '푸름이'..'그 사건' 이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래브라도 리트리버 여섯 형제 중 유독 고왔다. 인절미 사이에 낀 백설기처럼 포슬포슬했다. 막내였지만 가장 덩치가 커서 형제들과의 박치기 싸움에 밀리지 않았다. 이름은 ‘ㅍ’자 돌림인 ‘푸름이’. 형제 ‘파랑이’ ‘포슬이’ 등과 함께 2020년 7월 24일 삼성화재 안내견 학교에서 태어났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지망하는 꿈나무다. 생후 7주를 맞은 푸름이는 일반 가정에 1년간 위탁된다. 무보수 자원봉사자인 ‘퍼피워커(puppy walker)’의 집에 머물며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2020년 9월 12일. 퍼피워커를 신청한 지 1년 만에 안내견학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2시간 이론 교육을 마친 후 강아지 배정받기 위해 기다렸다. 푸름이를 보고 “참 잘생겼다. 저 강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훈련사가 꼬물거리는 강아지를 들어 올려 품에 안겨줬다. 푸름이었다. 축 처진 구슬 같은 눈매를 보니 순할 것 같았다. 훈련사는 “활발한 강아지”라고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푸름이가 왕년에 안내견 학교에서 개구쟁이로 이름 꽤나 날렸다는 것을.
푸름이는 집에 도착하자 진면모를 드러냈다. 가죽 소파, 원목 식탁 할 것 없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야무지게 볼일을 봤다. 일주일 내내 걸레를 들고 푸름이를 쫓아다녔다. 잠을 잘 때 아무도 옆에 없으면 앓는 소리를 냈다. 가족이 교대로 돌아가며 펜스 안에서 푸름이 곁을 지켰다. 신생아를 키우는 느낌이었다. 일주일 후 안내견 학교를 찾았다. 쪽잠을 잔 건 나만이 아니었다. 훈련사는 기력이 동난 퍼피워커들을 보며 “여러분은 가장 힘든 일주일을 보냈다”고 격려했다.
푸름이는 우리 가족의 첫 반려견이다. 남편이 “퍼피워커를 해보자”고 먼저 제안했다. 공항에서 일하며 경찰견을 자주 접했던 남편은 대형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딸과 아들도 합세해 졸랐다. 마침 조건이 맞았다. 퍼피워커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강아지를 하루 종일 돌봐줄 성인이 있어야 한다. 미취학 자녀와 반려견이 없어야 한다. 서울이나 수도권 지역에 거주해야 한다. 모두 해당됐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반려견을 키워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안내견학교 직원은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처음부터 배우는 게 낫다”고 말했다.
“사랑과 운동, 훈련 중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훈련사는 교육 시간에 퍼피워커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는 “사랑을 듬뿍 줘야 한다”고 답했고 누군가는 “사랑, 훈련, 운동 순으로 신경 써야 한다”고 답했다. 모두 틀렸다. 정답은 “운동, 훈련, 사랑” 순이었다. 힘이 넘치는 강아지들은 적절한 산책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시각장애인을 보조하기 위해 기초체력은 필수다. 사회화 훈련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기초적인 관문이다. 강아지도 매너가 있어야 한다. 사랑은 절제되면서도 따뜻해야 한다. 넘치는 사랑은 오히려 강아지를 망친다.
푸름이도 인간 사회의 규칙을 차근차근 배웠다. 몸무게가 5㎏에서 23㎏로 불어나는 동안 행동도 제법 의젓해졌다. 이젠 가구를 먹지 않는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가족들의 신발도 물고 다니지 않는다. ‘어른이’가 됐다고 분위기 있게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사색한다. 그래도 아직은 덩치만 큰 ‘쫄보’다. 오토바이의 굉음을 들으면 펄쩍펄쩍 뛴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 도둑이 침입해도 꼬리 흔들며 따라갈 것 같다. 첫눈을 냅다 삼킬 정도로 단순하다. 그래도 하루하루, 푸름이는 성숙해지고 있다.
“(예비 안내견) 못 들어가게 하면 큰일 나”
지난해 말 푸름이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강아지를 본 직원이 “들어가시면 안…”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다른 직원이 기겁하듯 재빨리 속삭였다. 예비 안내견과 동행한 퍼피워커가 롯데마트에서 거부당하는 사건이 있었던 지난해 12월 직후였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푸름이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전보다 그윽해졌다. “아, 쟤가 그 강아지구나”라며 할머니가 손주 보듯 기특해한다. “옷이 얇아 추워 보인다” “불쌍하고 힘들어 보인다”며 훈수를 늘어놓기도 한다. 원래 애처롭게 생겼을 뿐, 밥도 잘 먹고 산책도 잘 하는 명랑한 강아지다.
영종도의 아파트에 사는 푸름이는 ‘연예인 푸름씨’로 통한다. 푸름이가 착용한 주황색 조끼 때문인지 어디를 가도 시선이 쏠린다. 예비 안내견은 주황색 조끼를, 현역 안내견은 노란색 조끼를 입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식당이나 카페 방문을 줄이면서 많은 곳을 가진 못했다. 그래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 대형마트 등 공공장소를 가는 연습을 했다. 아직까지 거부당한 적은 없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푸름이를 공항에 데려가고 싶다. 공항엔 식당, 카페, 약국, 서점 등 사회화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유튜브에서 퍼피워커들이 강아지를 떠나보내는 장면을 수없이 봤다. 훈련사가 마지막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나가는 통로를 외웠을 정도다. 안내견 학교에 갈 때마다 그 통로에서 푸름이와 작별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눈치 없는 푸름이는 마지막인 줄 모르고 꼬리를 살랑이며 가버리겠지. 푸름이는 빠르면 올해 9월 늦으면 12월 훈련소에 입소한다. 아들 군대 가는 마음이겠거니, 하면서도 헛헛한 푸름이의 빈자리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먹먹해진다.
푸름이는 1개월에 거쳐 안내견 적합성 평가를 받는다. 10마리 가운데 3~4마리 가량이 합격한다. 건강, 성격 등 탈락 사유는 여러 가지이며 떨어질 경우 위탁 가정에게 1순위 무상 분양 선택권이 주어진다. 합격한 강아지는 6개월에서 8개월 간 훈련을 받은 후 최종 평가를 거쳐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거듭난다. 영국, 일본 등 30여개 국가에서 2만5000여 마리의 안내견이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 소속된 60여 마리가 시각장애인 곁을 지키고 있다.
안내견은 2살에 발탁돼 7~8살에 은퇴한다. 퍼피워커들은 수년을 기다려 유년시절의 친구를 옛 가정으로 맞이하기도 한다. 천방지축이었던 강아지는 어느새 젊음을 소진한 노견이 되어 인생 3막을 맞는다. 견생의 시작과 끝을 응원했던 퍼피워커들은 늘 그렇듯 강아지의 곁을 지킨다. 푸름이도 언젠가 다시 볼 날이 있겠지?
〈인터뷰를 마치고〉 유수영(43) 씨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주일 후 기자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유 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깊이 생각해보니 푸름이를 맡게 된 것은 사명감 때문인 것 같다”며 “시각장애인 한 명의 눈이 될 수 있는 안내견을 훈련시키고 돌본다는 것은 (제게) 큰 의미”라고 말했다. 유 씨는 푸름이가 훈련소로 돌아가기 전 함께 가족사진을 촬영할 계획이다.
박로명 기자/dod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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