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도 못 말린 '배터리 소송' LG 한판승..SK, 수조원대 합의 나설까
[경향신문]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10일(현지시간)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미국 내 배터리 팩·셀·부품 등의 수입을 “10년 동안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향후 배상금 협상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LG에너지솔루션(옛 LG화학 전지사업본부)과 불리한 위치에 놓인 SK이노베이션이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합의금’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우위 점한 LG…‘발등에 불’ 떨어진 SK
ITC는 지난해 10월부터 세 차례 발표를 연기한 끝에 이날 최종 심결(determination)을 내렸다. 결론은 LG에너지솔루션이 주장한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SK의 배터리 팩과 셀, 모듈, 부품, 소재 등 전 제품에 대해 10년 간 수입을 금지한다는 명령이었다. 2019년 4월 LG화학이 제기하며 시작된 소송이 1년 10개월 만에 일단락된 것이다. ITC의 결정문을 보면 LG가 영업비밀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한 범주가 모두 인정됐고, 이에 대한 징계도 ‘10년 수입 금지’라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다만 ITC는 SK가 배터리를 납품하는 포드(F-150)와 폭스바겐(MEB) 전기차의 미국 내 생산을 위한 배터리와 부품 등에 대해서는 이날부터 각각 4년, 2년 간 수입을 허용하는 유예 조치도 함께 내렸다. 미국 현지에서 완성차를 생산하는 포드와 폭스바겐이 대체 공급업체를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 것으로 풀이된다.
양사의 표정은 완전히 엇갈렸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SK이노베이션이 자사의 영업비밀을 탈취해 광범위한 영역에서 부정하게 사용해 경제적 피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인정됐다”며 “이번 결정은 30여 년간 수십조원의 투자로 쌓아온 지식재산권을 법적으로 정당하게 보호받게 됐다는 큰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배터리 산업에서 특허뿐만 아니라 영업비밀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해 국내 업체 기술력 보호와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 경쟁력 강화에 중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SK이노베이션은 “ITC가 앞서 만장일치로 자사 조기 패소에 대해 전면 재검토 결정을 한 이후 최선의 노력을 다해 소명했다”면서 “그러나 ITC가 영업비밀 침해 여부에 대해 실체적 판단 기회를 갖지 못해 아쉽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이어 “대통령 검토 등 앞으로 남은 절차를 통해 ITC 결정을 바로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ITC 결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향후 항소 등 정해진 절차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 진실을 가리겠다”고 밝혔다. ITC의 결정에 대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카드에 기대를 걸어보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 바이든 거부권 가능성은
한국의 행정심판 절차와 유사한 ITC의 결정은 60일 이내 대통령의 검토 기간을 거쳐 최종 승인되는 절차를 거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ITC가 단서조항으로 SK의 배터리 공급이 예정된 포드와 폭스바겐 전기차에 대해서는 유예기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등 미국 내 자동차 제조업 보호를 위한 조치를 함께 내렸기 때문에, 대통령의 전면적인 거부권 행사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ITC 결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역대 6차례 있었는데, ‘영업비밀 침해’ 사건에 대해서는 거부권이 발동된 전례가 없었다는 점도 행사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다만 지난달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가 ‘친환경·탄소중립’을 정책 최우선 순위에 놓고 있다는 점, 민주당이 의회에서 다수당 지위를 차지하는 데 결정타 역할을 한 조지아주에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1·2공장이 건립 중이라는 점은 마지막 변수로 꼽힌다.
SK이노베이션은 이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배터리 공장에 최대 50억 달러를 투자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최대 6000여개 창출하는 경제 효과가 있다”며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 그 피해가 단순히 SK에 국한되지 않고 조지아 전체, 나아가 미국 경제·사회에까지 미칠 수밖에 없음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 ‘조 단위’ 배상금 합의 급물살 타나
이날부로 ‘세기의 소송전’으로도 불렸던 양사의 소송전 가운데서도 핵심인 ITC 영업비밀 침해 사건이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양측이 물밑에서 벌이던 협상은 급물살을 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정세균 국무총리도 지난달 28일 “남 좋은 일만 시킨다”며 양사에 합의를 공개적으로 종용했지만, ITC의 결정을 앞둔 상황에서 두 회사 모두 기존 입장을 고수하면서 절충점을 찾지는 못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SK이노베이션을 향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날 오후 화상으로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SK가 당사 손해배상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수주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전향적으로 진정성 있는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만 미래 사업을 계속할 수 있다”고 밝혔다. ‘유럽 등에서 추가로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SK의 진정성 있는 자세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도 이날 입장문을 통해 “합리적인 조건이라면 언제든 협상에 임할 것”이라며 “소송을 조기에 종료하고 산업 생태계와 국민 경제 발전을 위해 협력해 나가자”고 밝혔다. SK로서는 ITC 결정에 대해서도 항소가 가능하다. 하지만 항소법원을 거쳐 연방대법원까지 재판이 장기화되는 과정에서도 수입금지 명령의 효력이 유지되기 때문에, ‘SK가 서둘러 합의에 나서려고 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양사 협상의 핵심은 배상금 규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배상금의 형태가 현금이나 현물이냐, 로열티냐, 또는 특정 회사 지분이냐 등의 문제는 곁가지에 가깝다. ‘총액’에서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에야 구체적인 지급 방식이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까지 증권가 주변에서는 LG가 2조5000억∼3조원 가량의 배상금을 요구한 반면, SK는 자회사(SKIET)의 상장 지분 일부를 포함한 5000억원 안팎을 제시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배터리 사업 구상에 차질이 불가피해진 SK가 불리한 입장에 놓인 것은 맞지만, 미국 조지아주 공장에 투자한 약 2조9000억원에 맞먹는 금액까지는 무리일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반면 LG는 “200%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가능하다”는 입장이어서 금액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치열하게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환보 기자 botox@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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