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기 관행" 주장에 철퇴..'환경부 블랙리스트' 실형이 남긴 것
지난 2019년 3월,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받던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습니다.
당시 화제가 됐던 건 법원이 이례적으로 길게 밝힌 영장 기각 사유였습니다. 법원은 '사정'과 '관행'을 들어, 김 전 장관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먼저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표를 받고, 이를 거부하면 표적감사를 벌인 혐의에 대해선 지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로 방만하고 해이해진 기관 운영을 수습해야 했던 사정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정권 교체기'라는 특수한 사정도 고려됐습니다.
법원은 또 임원 자리에 청와대와 환경부가 점찍은 내정자들을 특혜 채용한 혐의에 대해서도, 청 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오랫동안 있어왔다고 봤습니다.
영장 기각 소식에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앞으로 장관의 인사권과 감찰권이 어디까지 적법하게 행사될 수 있는지, 법원이 그 기준을 정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죠.
그리고 2년이 흘러, 사건을 심리해온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1부(김선희 임정엽 권성수)는 그 기준을 달리 세웠습니다. 김은경 전 장관의 행위가 '명백한 불법'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제(9일) 김 전 장관은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고, 함께 기소된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도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장관의 첫 법정구속 사례입니다.
■ '낙하산 인사'는 관행?…법원 "타파돼야 할 불법"
법원은 직권남용, 업무방해, 강요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장관의 주요 혐의를 대부분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공소사실은 여러 갈래이지만, 크게 보면 하나의 흐름입니다.
▲지난 박근혜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표를 종용하고, 이를 거부한 임원에 대한 표적감사를 벌여 사표를 받아낸 혐의, ▲이렇게 빈 자리에 청와대와 환경부가 몫을 나눠 내정자를 앉히기로 하고, 이를 위해 서류부터 면접까지 특혜 지원한 혐의, ▲청와대가 추천한 인사가 탈락하자 다른 지원자까지 전부 탈락시킨 다음, 대체할 자리를 만들어 앉힌 혐의 등이죠.
김 전 장관 측의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 새 정부의 환경 정책 기조에 걸맞은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겁니다. 지난 정부 임원들을 내치고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하는 인사들을 공공기관 임원 자리에 앉히는 게,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거죠. 또 이 같은 일은 이전 정권에서도 있어왔던 오래된 관행이라고도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두고 '원칙 없는 인사'라고 일축했습니다. 촛불 정부의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라며 강하게 비판했던 검찰의 손을 들어준 셈입니다. 특히 " 이전 정부에서 정권이 바뀌었을 때 일부 기관장이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이 사건과 같이 계획적이고 대대적인 사표 징구 관행은 찾아볼 수 없다"며 사건의 심각성을 강조했습니다.
또 설령 이전 정부에서 비슷한 관행이 있었더라도 "이는 명백히 법령에 위반되고 그 폐해도 매우 심해 타파돼야 할 불법적인 관행이지 피고인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유 또는 유리한 양형요소로 고려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 '물갈이' 위한 사표 요구…거부하자 표적 감사
과정별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재판부는 우선 김 전 장관이 단순히 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을 '물갈이'할 목적으로 사표 제출을 요구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임원들의 직무 수행능력이나, 공공기관운영법 등을 기준으로 사표 요구 대상자를 선정했음을 인정할 자료도 없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김 전 장관 측은 임원들의 사직 의사를 확인했을 뿐, 사표 제출을 지시한 적은 없다고 반박해왔죠. 이들이 관행에 따라 자발적으로 사표를 낸 것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사표를 낸 임원들은 법정에서 어떻게 증언했을까요?
A: "새 정권이 공공기관 임원의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표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표 제출 요구가 없었다면 임기종료일까지 근무했을 것이다."
B: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티면 가장 고생할 사람이 환경부 후배들이고, 사표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환경부와 기관과의 업무 협조가 잘 되지 못할 우려가 있어 사표를 제출했다."
C: "사표 제출을 하라는 말이 없었다면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환경부의 사표 제출 요구에 따라 사표를 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재판부는 "사표 제출을 요구받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은 내심의 의사에 반해 사표를 제출하거나, 과거 정권 교체 이후 관행을 고려해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습니다.
김 전 장관은 사표 제출을 거부한 임원들에 대해 "즉시교체 대상이라 빨리 나가야 할 텐데", "다른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일괄해 사직서를 냈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법원은 실제로 김 전 장관이 당시 환경공단 상임감사 김 모 씨를 상대로 사표를 받기 위한 표적 감사를 벌였다고 판단했습니다.
환경공단 감사실은 아래와 같은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형사고발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사직서 제출을 유도하려는 목적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감사과정에 김 씨는 환경부 감사관실 소속 서기관에게 "이렇게 감사를 오는 것이 내가 사표를 내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라고 질문했고, 이에 서기관은 "왜 이렇게 사표 내시는 것을 어려워하세요?"라고 답했습니다. 김 씨는 이 말을 들은 직후 사표를 냈습니다.
■ 철저하게 몫 나눈 청와대와 환경부…임원 자리 '맞교환'까지
이렇게 사표 제출 절차가 마무리 된 후 타깃이 된 건, 환경부 산하 주요 공공기관의 임원 자리 17곳입니다. 법원은 이 가운데 8곳은 청와대가, 9곳은 환경부가 제 몫으로 정한 뒤 각자 추천한 내정자를 앉히기 위해 전방위적인 노력을 했다고 봤습니다. 결국, 임원추천위원회를 통한 공모 절차는 형식에 불과했다는 판단입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환경부는 각자의 몫을 지키기 위해 일종의 힘 겨루기까지 벌였습니다. 전 환경부 운영지원과장 김 모 씨의 진술을 보면 당시 상황이 자세히 드러납니다. 김 전 장관이 청와대 몫인 환경공단 상임감사 자리에 특정인을 추천하자, 청와대는 "참고는 하겠지만 청와대 추천 자리니 다른 사람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청와대 추천 인사 박 모 씨가 심사에서 떨어지자 환경부는 다른 청와대 몫 자리에 그를 대신 앉히겠다고 했는데, 이에 청와대는 "환경부의 업무 실수로 탈락시켜 놓고 원래 당연히 청와대 몫인 자리로 교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정해진 몫을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신미숙 전 비서관은 "환경부가 박 씨를 통과시키기 위해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6하 원칙에 따라 소상히 보고하라"는 요구를 했고, "환경부에서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길래 이런 결과가 나왔냐"며 따지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자리 '맞교환' 정황도 나타났습니다. 김 전 장관이 청와대 몫인 환경공단 경영기획본부장 자리를 환경부에서 추천하겠다고 하자, 청와대 측이 "장관이 너무 자리 욕심이 많다"며 그럼 같은 공단의 다른 환경부 몫 자리를 대신 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 교환은 실제로 성사됐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꼭짓점엔 청와대가 있었습니다. 법원은 환경부가 추천한 임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승인해주지 않는 방식으로, 청와대가 환경부 몫의 임원 내정에도 관여했다고 인정했습니다.
환경부 공무원들도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청와대 몫이 아닌 자리라고 하더라도 모든 후보자에 대해 청와대와의 협의를 거쳐야 하고, 사실상 청와대에서 후보자를 최종 결정했다", "환경부장관 몫으로 분류된 직위에 대해서도 최종 결정권은 청와대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 자소서 써주고, 면접서 분위기 유도…합격 전방위 지원
그렇다면, 실제 채용 과정에서 청와대와 환경부는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우선 내정자의 자격요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경력증명서를 받아서 보완해주고, 자기소개서나 직무수행계획서를 직접 써주기도 했습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내부 업무보고 자료를 전달해 준비를 도와주는가 하면, 면접에 대비해 예상 질문과 답변자료를 만들어주기도 했죠. 심지어는 실제 면접 질문지를 직접 전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면접 심사 현장에선 더 교묘한 지원이 이뤄졌습니다. 일방적으로 높은 점수를 부여한 것은 물론, 다른 임추위 위원이 부정적인 의견을 낼 때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장점을 어필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지원자에 비해 객관적인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합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해준 겁니다.
법원은 이런 지시를 받은 환경부 실·국장들이 큰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근거로 김 전 장관이 실제로 자신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한 환경부 공무원들에 대해 여러 차례 좌천성 인사를 단행했다는 점을 들기도 했는데요.
김 전 장관이 과거 보도자료 작성 과정에서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청와대에 문서를 보냈다거나, 장관의 지시에 미적거린다는 등의 이유로 환경부 소속 공무원들을 여러 차례 좌천시켰다는 진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靑 비서관이 단독 결정할 수 없어"…윗선 개입 가능성 열어둬
신미숙 전 비서관은 김 전 장관 혐의 가운데, 공공기관 임원들에 대한 사표 제출 요구를 제외한 일부 혐의에 공모가 인정돼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관심은 양형 사유에 쏠렸습니다. 재판부는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피고인의 지위에 비춰 내정자를 확정하고, 그에 대한 지원결정을 하는 것은 피고인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점 등 이 사건 각 범행 가담 경위 및 정도에서 참작할 사정이 있다"고 밝혔는데요. 쉽게 말해 청와대 '윗선'에서 범행을 지시하거나 범행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시사한 겁니다.
앞선 검찰 수사 때도, 자연스럽게 이런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실 소속 행정관 송 모 씨는 수사 당시 "인사 추천 대상은 균형인사비서관실에서 결정한 후 인사수석에게 보고해 확정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청와대 조현옥 인사수석비서관 등이 수사 대상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소환 조사까지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수사의 동력을 잃었고, 신 전 비서관이 검찰 조사에서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며 유의미한 진술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되면서 수사팀은 책임을 추궁할 객관적인 물증 확보에도 실패했습니다.
법원이 신 전 비서관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 윗선에 대한 수사가 재개될 수 있지 않느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지만 당장 진행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로선 신 전 비서관의 진술이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데 가장 중요한 데, 법원이 지적했듯 신 전 비서관은 "청와대와 환경부가 공공기관 임원 직위를 나눠서 내정자를 정한 적이 없고 내정자들에 대한 지원행위는 환경부 공무원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결국 새로운 제보나 문건이 입수되지 않는 한, 수사의 단서를 찾기 힘들 것이란 예상이 많습니다.
■ "文 정부에 블랙리스트 없다"는 청와대…제도 개선 계기 될까
이번 판결에 대해 청와대는 어제(10일), "문재인 정부에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번 사건이 과거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비교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정 사안에 불이익을 주기 위해 대상을 특정해 감시와 사찰을 벌인 이전 정권의 블랙리스트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거죠. 이어 "앞으로 상급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확정될 것"이라며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도 남겼습니다.
청와대는 또 "문재인 정부는 前 정부에서 임명한 공공기관장 등의 임기를 존중했고, 그것이 정부의 인사 정책 기조였다"며 구체적인 수치까지 댔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사표를 제출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3명 가운데 상당수를 포함해, 대부분이 임기를 제대로 마치거나 적법한 절차로 퇴직했다는 겁니다. 사건의 본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입장입니다.
다시 2019년 3월, 김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던 때로 돌아가 봅시다. 당시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법원이 기준을 정리해줄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이번 검찰 수사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공공기관의 장과 임원에 대한 임명 절차를 보다 투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판결은 그동안 오래된 관행으로 여겨졌던 정권교체기 '낙하산 인사'에 제동을 걸고, 불법적인 요소를 가려냈습니다. 하지만 이 판결이 의미를 가지려면, 단순히 사건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제도와 인식의 변화가 뒷받침돼야 할 겁니다. 불법적인 관행을 타파하고 공정경쟁을 통해 직위의 무게에 맞는 전문가를 선발하는 것, 이제 정부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최유경 기자 (60@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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