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혀 절단한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 57년 전 같은 사건 피해자는 왜 유죄였나

이강진 2021. 2. 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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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부산 황령산 사건'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
"피해자 방위행위 과하지 않아"..불기소 처분
57년 전 성폭력 저항하다 가해자 혀 절단한 피해자는 유죄
"검찰이 허위 자백 강요"..피해자, 법원에 재심 청구
재심 개시 여부에 황령산 사건 결과 영향 미칠지 관심
법조계 "재심사유 엄격..직접적 영향 미치긴 어려울 듯"
성폭행에 저항하다가 가해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피해자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은 가운데 57년 전 전혀 다른 판단을 받았던 유사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57년 전 성폭행범의 혀를 깨물었던 최말자(75)씨는 ‘중상해’ 혐의로 구속되고 가해자 보다 무거운 형을 받았다. 

두 사건의 결과가 달라진 이유가 뭘까.

◆“신체 및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

11일 법조계에 따르면 부산지검 동부지청은 지난해 7월 부산 황령산에서 발생한 A씨의 강간치상 등 혐의 사건과 관련해 그의 혀를 깨물며 저항한 피해 여성 B씨를 최근 불기소 처분했다.

사건 당시 술에 취한 B씨는 황령산 산길에 주차된 차량에서 자신을 강제추행한 A씨의 혀를 깨물어 혀끝 3㎝가량을 절단시켰다. 이에 A씨는 B씨를 중상해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및 폐쇄회로(CC)TV 등을 통한 수사로 A씨의 강제추행 사실을 확인했다. B씨에 대해선 정당방위 심사위원회를 열고, 그의 혀 절단 행위가 정당방위를 넘은 ‘과잉방위’이기는 하지만 형법 제21조 제3항의 책임조각 사유에 해당해 면책된다며 B씨를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형법 제21조 제3항은 “방어행위가 정도를 초과한 경우라도, 그 행위가 야간 등 불안한 상태 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발생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경찰과 달리 B씨의 방어행위가 과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검찰 관계자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저희는 (B씨의)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했다고 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B씨의 행위는 신체 및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A씨에 대해선 강간치상, 감금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사건

반면 57년 전 비슷한 사건 피해자였던 최말자 씨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아야 했다.

1964년 5월 6일 밤, 좁은 길가를 가던 최씨(당시 18세)를 노모(당시 21세)씨가 덮쳤다. 최씨는 뒤로 넘어지며 돌뿌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노씨는 성폭행을 시도하며 강제로 입을 맞췄고, 최씨는 저항하면서 그의 혀를 깨물었다. 노씨의 혀 1.5㎝ 정도가 잘려나갔다.

최씨는 노씨에게 중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6개월간 구속됐고, 최씨 아버지는 딸을 꺼내기 위해 되레 노씨에게 돈을 주고 합의해야 했다. 

최씨 측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최씨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했지만, 검찰과 법원은 오히려 그를 가해자로 몰았다.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최씨에게 고의로 노씨의 혀를 절단했다고 자백할 것을 강요했다. 노씨에게는 성폭력 혐의도 적용하지 않았다. 부산지법은 노씨에게 특수주거침입 등의 혐의만을 적용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피해자인 최씨에게는 중상해 죄를 적용해 노씨 보다 무거운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성폭행을 피하고자 저항한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최씨 판결문에서 “범행 장소와 집이 불과 100m 거리이고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들릴 수 있었다.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방어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최씨는 “(가해자와) 결혼하면 간단하지 않냐”, “가시나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지난해 5월 6일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반세기만의 재심 청구...수사기관 인식 바뀌었지만 결과는?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가해자로 몰려 ‘못된 년’, ‘독한 년’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최씨는 법원 판결 이후 56년만인 지난해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억울한 세월을 보상받을 수도 없지만 늦게라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형사사건 재심은 이미 확정된 판결에 흠결 사유가 있는 경우 재판 당사자 등의 청구를 통해 이뤄진다. 최씨의 재심 청구사건은 지난해 8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공판이 진행됐다.

최씨 측은 △기소 전 검찰로부터 변호인 선임권 △진술거부권 등을 전혀 고지받지 못한 채 부당하게 옥살이를 한 점 △수사 과정에서 욕설·협박 등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당한 점 △노씨가 사건 이후 병역 신체검사에 합격·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는 이웃 진술 등을 보면 중상해가 아닌 가벼운 상해죄로 판단했어야 한다는 점 등을 들며 재심 개시를 요청했다.

다만 사건 후 시간이 많이 흘러 관련 수사자료들이 없는 상황이어서 최씨 측은 병무청 자료 등을 근거로 재판부에 재심 필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를 지원하고 있는 부산여성의전화의 배은하 성·가족폭력상담소장은 “공판은 모두 마무리됐고, 현재는 재판부의 판단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선 최씨의 재심 청구 이후 벌어진 ‘황령산 사건’의 처리 결과를 두고, 과거와는 달라진 수사기관의 인식이 반영되긴 했지만 최씨의 재심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서혜진 변호사는 “(검찰의 정당방위 인정은) 너무 당연한 판단”이라면서 “최씨 사건과 비교해보면 ‘그래도 세상이 변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만 서 변호사는 검찰의 이번 판단이 법원의 재심 개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사건 당시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당연히 영향을 줄 테지만, 50여년 후의 사건이 재심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다”며 “‘이런 사안에서는 이제 정당방위로 인정되고 있구나’라는 정도의 정보제공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영미 변호사는 “(황령산 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한 것은 법리적으로 맞는 판단”이라면서도 “재심사유는 굉장히 엄격하다. (이 판단이)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볼지는 애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법원은 강제추행을 당하던 피해 여성이 가해 남성의 혀를 물어뜯은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여성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보고, 1989년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2012년에는 의정부지검이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 절단한 여성에 대해 검찰시민위원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불기소 처분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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