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성곽길의 세가지 성돌 [정동길 옆 사진관]
[경향신문]
조선 태조때 축조된 서울 남산 성곽은 600년을 넘게 버텨냈다. 성곽을 이루는 돌들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가깝다. 세종때 일부 개축을 했는데 이때 지은 돌은 정으로 쪼아서 각진 부분이 없는 돌로 만들었다. 장충동 부근 옥수수알 모양의 성돌이 바로 세종때 개축된 것이다. 임진외란과 정유재란이 지난 후 숙종때에도 다시 개축을 했다. 발전된 축성 기술로 돌과 돌사이에 틈이 없도록 돌을 가공해 성벽을 만들었다.
성곽이 남산 N타워쪽으로 이어진다.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이다.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만 지낼 수 있게 하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지금은 국사당터 표지석만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烽燧)의 종착점인 목멱산 봉수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렸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목멱산 봉수대는 세종 5년(1423)에 설치되어 1895년까지 500여년간 존속했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복원했다.
팔각정을 지나 숭례문쪽으로 내려오면 성곽 바깥길이 없다. 망원렌즈로 본 성벽은 태조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주변은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성곽을 훼손했던 곳이다. 남산에서 내려온 성곽이 사라지는 지점이다.
한양도성유적 전시관에 끊긴 성곽을 땅에 표시해 놓았다. 2013년 한양도성 보존 관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발굴했는데, 땅 속에 묻혀 있던 성곽의 기저부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아래 1열은 태조때 지은 자연석이다. 2열과 왼쪽 모난 곳이 없는 돌이 세종때의 성돌이다. 숙종때 지은 오른쪽 성돌은 틈세가 없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우철훈 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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