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의 두얼굴]①"샤넬 한달, 로렉스 세달"..명품 열풍 얼마나 뜨겁나
에르메스·샤넬·로렉스 품귀 현상에 리셀가도 '천정부지'
[편집자주]대한민국은 '명품 공화국'이다. 직장인들은 월급을 모아 로렉스를 플렉스하고 생활비를 아껴 샤넬백을 산다. 이른 새벽 매장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가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시로 오르는 몸값에도 명품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과분한 명품 사랑에도 한국 소비자들은 찬밥 신세다. 오히려 도를 넘은 고객 줄 세우기와 잇속 차리기에 급급하다. 명품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들여다 봤다.
(서울=뉴스1) 배지윤 기자 = #1.직장인 김지수씨(가명·30·여)는 지난주 토요일 이른 새벽부터 서울 시내 샤넬 매장에 나섰다. 원하는 핸드백을 사려면 영업 시작 전 줄을 서도 구할 수 있을까 말까여서다. 긴 대기 끝에 매장에 들어선 그는 마침내 원하는 핸드백을 손에 쥐었다. 그가 '오픈런'(오픈 시간에 맞춰 매장으로 방문하는 것)에 나선 지 약 한달만이었다.
#2.오는 4월 결혼을 앞둔 박지희씨(가명·29·여)는 지난 9일 예물 시계를 구매하기 위해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았다. 11시 40분쯤 이미 대기 순번은 120번을 넘겼지만 판매 직원은 "폐점시간까지 입장을 장담할 수 없다"고 안내했다. 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신세계백화점 본점도 상황은 비슷했다. 결국 7시간을 기다린 그는 오후 6시쯤 매장에 들어섰지만 원하던 상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씨는 "세달째 서울 시내 로렉스 매장을 돌고있지만 재고가 없다"고 토로했다.
재고가 없어서 못파는 명품 업체들에게 코로나19는 '딴 세상 얘기'다. 최근 2~3년 새 길거리엔 고가의 핸드백이나 신발·액세서리로 치장한 이들이 찾아보기 쉬워졌다. 소비 주축으로 떠오른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가 명품 쇼핑을 '힙'한 문화로 받아들이고 있어서다.
명품 구매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면서 최근엔 일부 브랜드 제품은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수급 불균형' 현상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이런 현상이 명품 소비를 더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내 집 마련 어려워지자…명품 소비 '욜로족' 늘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부자들이나 유명 연예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명품은 소비 주축이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에서 2000년대 초 출생 세대)와 '남성 고객'까지 확산되면서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11일 온라인 명품 커머스 머스트잇에 따르면 지난해 명품 거래 건수는 69만건에 이른다. 이는 전년 대비 64% 성장한 수치다. 특히 전체 매출에서 20대 비율은 절반에 달했으며, 30대(22%)가 그 뒤를 이었다. 10대와 40대 매출 비율은 10% 수준을 기록했다.
'명품은 여성의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깨진 지 오래다. 최근에는 남성 고객의 명품 수요가 도드라지고 있다. 실제 G마켓에 따르면 최근 한 달(1월 9일~2월 8일) 30대·40대 남성 명품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각 14%, 22%씩 증가했다.
이처럼 기성 세대와 달리 부동산 시세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이 어려운 밀레니얼 세대는 명품 소비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월급을 모아 명품을 사고, 월세를 내더라도 외제차를 끌며 당장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일명 '욜로족'이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 뉴미디어의 활성화는 명품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던 과거와 달리 유명 래퍼나 인플루언서가 미디어에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플렉스' 문화가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최근 인기 유튜브 콘텐츠로 '명품 하울(개봉)'이 꼽히는 이유다.
명품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수요 공급간 불일치도 심화하고 있다. 인기 핸드백부터 주얼리·패딩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김씨는 "과거에는 샤넬 핸드백을 구매하려면 예약제로 구매가 가능했지만 이런 제도가 사라지면서 구매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졌다"며 "원하는 핸드백을 손에 쥐려면 이른 새벽에 나와 오픈런을 해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설명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을 사실상 포기한 밀레니얼 세대가 많아지고 있다"면서 "무리해서 내 집을 마련해 '하우스 푸어'로 살 바엔 당장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명품' 또는 '외제차' 등 사치품에 지출을 늘리고 있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렉스·샤넬, 없어서 못산다"…식을줄 모르는 명품 인기
실제 명품 구매 현장에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독보적 인기를 누린 명품은 '샤넬'이었다. 지난 9일 1시 20분쯤 방문한 롯데백화점 본점 내부에는 15명 남짓한 손님들로 이미 가득했으며 대기 고객들도 적잖게 몰렸다. 이미 220여명의 대기고객이 응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연차를 쓰고 샤넬 매장을 방문한 김지원씨(여·32)는 "클래식백 등 인기 품목 구매하려면 한달 동안 오프런을 다녀도 구매할 수 있을까 말까한다"면서 "샤넬이나 로렉스는 리셀 가치가 높아 전업 리셀러들과도 경쟁해야 해 인기 품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에서는 핸드백 구경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1000만원을 호가하는 버킨백·켈리백을 구매하려면 주얼리·신발 등 비인기 품목으로 실적을 쌓아야 구매할 수 있다.
로렉스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서브마리너·데이트저스트 등 1000만원이 훌쩍 넘는 인기 시계 모델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시착용 시계 이외 판매용 제품은 구경조차 어렵다.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로렉스 구매에 성공했다는 의미의 '성골'이란 은어도 등장했다. .
이런 현상에 시계 리셀 거래 웹사이트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스타벅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매장가 1165만원에 판매되고 있는 서브마리너 그린(126610LV) 모델의 경우 리셀가가 2500만원 안팎을 웃돈다. 정가에 2배 이상 비싼 가격에 리셀 거래가 이뤄지는 셈이다.
특히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장기화로 지난해부터 국내 명품 구매 경쟁은 한층 더 치열진 모습이다. 비싼 국내 판매가 탓에 면세점·해외 지점으로 분산되던 명품 소비가 백화점 및 청담동 로드숍 등 국내 명품 매장으로 몰리고 있어서다.
명품 특성상 리셀이 쉽다는 점도 명품 소비가 급증한 원인으로 꼽힌다. 많게는 연간 3차례 가격 인상이 이뤄지는 만큼 사용하던 제품을 몇 년 뒤 되팔더라도 제값을 받고 팔 수 있어서다. 이런 현상에 중고 명품의 몸값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실제 중고 명품 시장은 지난 2012년 1조원 수준에서 지난해 말 7조원까지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밀레니얼 세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비싸고 희귀한 한정판 제품이나 명품을 구매해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인증샷을 올리는 과시적인 문화가 자리잡았다"면서 "먼 미래 보다는 현재를 즐기는 '욜로 문화' 확산과 맞물리면서 젊은 세대의 명품 소비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jiyounba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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