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갓집의 품격.."몹쓸 전염병, 피하는게 효도"

임소연 기자 2021. 2. 11.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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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설 대이동은 없다] '5인 이상 집합 금지'가 만들어낸 온라인 차례, 랜선 모임으로 모인다
퇴계 이황 후손도 '줌' 켜고 랜선 차례…컴퓨터 향해 절한다
지난달 20일 퇴계 이황 선생의 후학들이 관(冠)을 쓰고, 컴퓨터를 향해 절을 하고 있다/사진=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제공

#지난달 20일 머리가 희끗희끗한 퇴계 이황 선생의 후학들이 관(冠)을쓰고, 컴퓨터를 향해 절을 했다. ‘코로나19’로 5인 이상 모임이 제한되자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온라인으로 지냈다. 평소 같으면 종택의 앞마당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지만 올해는 인터넷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에서 모였다.

#강원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 대동계는 올해 도배례(都拜禮)를 쉰다. 1577년부터 430년 동안 대동계는 설 다음 날 온 주민이 모여 어른께 세배하고, 윷놀이했다. 지난해 설에도 200여명이 모였다. 도배례를 쉬는 건 6·25전쟁 직후와 마을에 구제역이 퍼졌던 2011년뿐이다.

‘지금은 몹쓸 전염병을 피하는 게 효도다.’ 해마다 설이면 종손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 종갓집도 올해만큼은 가족들의 방문을 말렸다. ‘5인 이상 모임’ 금지하는 정부의 방침에 맞춰 제 건강과 부모 건강을 지키는 게 '도리'라고 강조했다.

노트북 화면 속 신주에 절을 올리고, 화상통화로 손녀의 세배를 받는 게 생소하지만 형식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76)은 "조선시대에도 돌림병이 돌 때는 차례나 제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식혜·수정과 테이크아웃…"하늘이 가족 모이는 것을 말리니 어쩌겠는가"

지난해 설 강릉 대동계의 '도배례' 행사/사진=엄명석 대동계 총무 제공


경북 칠곡군 종갓집 종손 이병구씨(68)는 지난해 추석에 이어 이번 설에도 가족들에게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지난해 추석 때 가족 6~7명이 와 음복도 도시락으로 대체했는데 올 설날엔 식혜나 수정과를 '테이크아웃'으로 준비할 예정이다.

조선시대 공조참의를 지낸 석담 이윤우 선생의 16대 종손인 이씨는 "코로나 역병으로 가족 관계가 단절되고 있다"면서도 "하늘이 모이는 것을 말리니 손녀와 화상통화로 아쉬움을 달랜다"고 말했다.

강릉 대동계는 430년의 역사 동안 몇 안 되는 도배례 취소를 올해 결정했다. 마을에 ‘코로나19’에 취약한 어르신이 많은 것을 고려했다. 엄명석 대동계 총무는 "아쉽긴 건강이 우선"이라며 “자식들에게도 오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 된 도리에선 누구든 그리할 것"이라고 했다.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의 예안 이씨 참판댁 종손 이득선씨(79)도 "옛날 같으면 자식들이 '내가 병에 걸리더라도 부모님은 봬야지' 했으나 지금은 부모를 걱정해 안 내려온다"고 말했다.

이씨의 다섯 자녀 부부들은 따로따로 고향집에 오기로 했다. 한 번에 모이면 28명이나 되는 대가족이다. 이씨는 "코로나가 천륜끼리도 못 만나게 하니 안타깝다"면서도 '5인 이상' 모이지 말라는 정부 지침을 따르기로 했다.

◇"정부의 지침 떠나 코로나 상황에서 부모 찾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

지난달 20일 퇴계 이황 선생 불천위 제사를 위해 노트북 줌(Zoom) 화면에 신주를 띄워놨다/사진=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제공
지난달 20일 퇴계 이황 선생 불천위 제사를 위해 노트북 줌(Zoom)으로 후학들이 모였다/사진=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제공



김병일 원장은 효도의 출발은 부모가 준 몸을 잘 보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시대도 돌림병이 돌면 제사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며 ”정부의 지침을 떠나서 (전염병이 있는데) 자식이 부모를 찾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얼굴을 직접 못 본다고 해서 효도하는 마음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라며 "집에 갈 수 없을 때 온라인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부모님에게 영상전화, 문자, 메일, 카카오톡으로 연락해도 된다"고 전했다.

하지만 종갓집도 ‘5인 이상 모임’이 지속되는 것은 걱정이다. 석담 선생의 종손 이병구씨는 2월 중순 예정된 집안의 ‘불천위 제사’가 고민이다. 설날 차례와 달리 제관이 최소 12명 필요해서다. 빨리 코로나가 가라앉아 예전처럼 가족이 모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들의 당부와 정부의 귀성 자제 지침으로 이번 설 연휴 교통 통행량은 전년 대비 30%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이 지난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설 연휴 예상 이동량은 하루 평균 438만명으로 지난해보다 32.6% 줄 것으로 보인다.

임소연, 홍순빈 기자
"모이면 12명, 올 설엔 차례도 세배도 안해요"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설연휴, 찾아뵙지 않는게 '효'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다. /사진=뉴스1

코로나19 여파로 민족대이동이 사라지면서 설 명절의 풍습도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5인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되면서 거주지가 다르면 가족이라도 5인 이상 모일 수 없어서다. 시민들은 4인 이하 소규모로 모이거나 '랜선 모임'으로 이를 대체할 예정이다.

◇세배·차례 사라지고…'온라인 참배' 확산

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윤모씨(31)는 올 설은 차례를 지내지 않을 계획이다. 해마다 설과 추석은 물론, 한식 등 주요 절기마다 큰집에서 12명이 모여 제사를 챙겼지만 이번에는 세배조차 올리지 않는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65세를 넘긴데다가 4살 아이도 있어 코로나 감염을 우려해서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선산에는 윤씨네만 따로 방문하고, 큰집 등에는 카카오톡과 영상통화 등으로 안부를 전하기로 했다. 윤씨는 "(평년에는)제사를 드리고 가족들과 이야기하다가 집에 왔다"면서 "코로나 때문에 거의 6개월 넘게 가족들 얼굴도 못 봐서 좀 안타깝다"고 밝혔다.

구로구에 사는 박모씨(59)도 세배와 예배를 포기했다. 해마다 큰집인 박씨의 집에서 작은집 가족들 4명이 찾아와 차례 대신 예배를 드렸지만 올 설은 초대를 안하기로 했다. 박씨는 "모이면 기본 4명 이상"이라면서 "안타깝지만 올해는 통화만 할 예정"이라고 했다.

국립묘지도 비대면으로 전환한다. 서울 현충원 등 국립묘지 11곳은 설 연휴기간인 11일부터 14일까지 현장 참배를 중단한다. 기일 등의 불가피한 경우에만 사전 예약을 받아 허용된다. 대신 유족들은 집례관·의전단이 묘소를 찾아 대신 헌화 및 참배를 한 사진을 받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보건복지부에서 운영 하는 'e하늘 장사정보'에서 '온라인 추모·성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또 국내 한 IT기업은 화상으로 가족 모임을 할 수 있도록 설 연휴 기간 영상 회의 플랫폼을 무료로 운영할 계획이다.

5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직원이 간편식 명절 제수용품을 정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가족 어렵다면 소규모로…차례 안된다면 세배라도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선에서 최소한의 모임은 유지하겠다는 시민들도 있다. 대학생 민모씨(25)는 종손인 아버지를 따라 충북 진천에서 '4인 차례'를 올릴 계획이다.

코로나 전에는 15~16명이 모여 차례를 드렸지만 이제는 가족별로 내려가 할머니를 뵙기로 했다. 민씨와 아버지·어머니가 첫날 방문해 차례를 올리고 떠나면, 둘째날에는 작은 아버지 가족이 방문하는 식이다.

민씨는 "코로나 이후 차례상도 간소하게 줄여 준비가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모임금지는 정부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충남 서천에 거주하는 백모씨(65)도 올 설에는 공주에 계신 어머니께 세배만은 직접 올리기로 했다. 해마다 차례를 드리던 큰집이 코로나를 이유로 모이지 말자고 제안하면서다.

큰집 역시 공주에 있지만 고령인 어머니만 찾아뵙고 다른 가족들은 전화와 문자로만 안부를 전할 예정이다. 백씨는 "아내도 가지 않고 나만 홀로 갔다올 예정"이라면서 "주위에서도 다 요즘 차례는 지내지 말자고 한다"고 했다.

정한결 기자
"손주 얼굴 까먹겠다"는 시어머니…"누가 대신 신고해 달라"는 며느리
(서울=뉴스1) 민경석 기자=설 명절 연휴를 이틀 앞둔 9일 서울 강남구 고속터미널 경부선 승차장이 여느 명절 때와는 달리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1.2.9/뉴스1

정부가 설 연휴 '5인 이상 모임 금지'를 유지하면서 자식들의 고민이 깊어진다. 일각에선 이번 설에 고향을 방문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반기지만 “지난해 추석 때도 방문하지 않아 망설여진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걱정은 되지만, 자식 입장에선 눈치…"문자로 신고하면 익명 보장"

경기도 성남에 거주하는 윤모씨(34)는 지난주 시어머니로부터 "이러다 손주 얼굴 까먹겠다"는 전화를 받고 설날 계획을 변경했다. 윤씨는 “원래 아이들과 집에서 보낼 생각이었으나 내심 고향을 방문했으면 하는 것 같아 기차표를 끊었다”고 말했다.

외며느리인 탓에 차례상과 식사준비를 하는 게 만만치 않지만 며느리 된 입장에서 먼저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서울 도봉구에 살고 있는 정모씨(38)도 이번 설에 고향에 내려갈 예정이다. 시댁 큰며느리로부터 다들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씨는 “남편이 삼형제라 다 모이면 10명은 될 텐데 집에서 모이니 어떻게 할 방법도 없다”며 “우리끼리 조심하면 되지 않냐는 눈치다”라고 했다.

고향집에 내려가는 대신 '혼자 여행'을 계획한 직장인도 있다. 서울 관악구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장모씨(31)는 지난달 강릉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 장씨는 "별다른 계획이 없다고 하면 부모님이 내려오라고 할 것 같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며 "혼자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며 쉴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설 연휴 기간 고향집 방문 여부를 두고 걱정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부 방침에 따르면 직계 가족이라도 등록 거주지가 다를 경우 5인 이상은 모일 수 없다. 이를 어길 시엔 1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신고 절차를 묻는 글도 있다. 동탄의 한 맘카페에는 “112 문자로 신고를 하면 익명이 보장된다”며 “지인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대신 신고를 하는 방법도 있다”는 구체적인 방법이 공유됐다.

◇과태료 올렸으면…전문가들 "가족끼리 털어놓고 이야기해야"

(대전=뉴스1) 김기태 기자 = 설 명절을 나흘 앞둔 7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참배객들이 미리 성묘를 하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오는 11일부터 14일까지 운영을 중단한다. 2021.2.7/뉴스1


취준생들도 내심 '5인이상 집합금지' 조치가 반가운 눈치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취준생 박모씨(26)는 지난 추석에 이어 이번 설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예정이다.

박씨는 "안 그래도 취업이 어려워 친척들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운데, 이참에 잘됐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설 연휴 동안 그동안 부족했던 과목 공부들을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설날 방역대책이 더 엄격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나온다. 윤씨는 "시댁이 시골이다보니 수도권에 비해 코로나19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며 "그렇다보니 당연히 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신다"고 말했다. 장씨도 "추석 연휴 지역 간 이동을 제한하거나 과태료 수준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럴 때일수록 세대 간 대화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한다고 조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랫사람 입장에선 아무래도 먼저 말하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도 "가족간 논의와 조정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전례 없는 특수한 상황이고 국가 정책 차원에서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시행하고 있는 만큼 잘 말씀드리면 어른들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며 "가족 간 서로의 상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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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연 기자 goatlim@mt.co.kr, 홍순빈 기자 binihong@mt.co.kr, 정한결 기자 hanj@mt.co.kr, 김지현 기자 flo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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