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훈 시인 아홉 번째 시집 '동면' 출간

조정진 2021. 2. 1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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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적 시선으로 주변의 삶과 풍경 포착..동면의 삶에서도 신생의 힘 잠재해 있음을 투시
시집 ‘동면’ 표지.
‘노동시인’으로 잘 알려진 정세훈(66)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동면’(b)이 출간되었다.

정세훈 시인은 권두 ‘시인의 말’에서 “우리의 문학은 산업화와 자본으로부터 점령당한 인간의 삶의 본질을 찾아 제자리로 복귀시켜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됐다.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우리 사회를 진정한 인간의 삶을 위한 장으로 구축해 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노동자적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의 삶과 풍경을 포착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다.

시집 제목으로 내세운 ‘동면’이란 겨울이 지난 후 봄에서 가을까지 이어질 새로운 삶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겨울 동안의 긴 잠이다. 그래서 동면의 시간 속에는 깨어난 이후 활동해 나갈 삶이 잠재되어 있다.

시집의 제목이 시집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고 할 때, 제목 ‘동면’은 이 시집이 잠재성의 시간을 전면화하여 의미화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전철역엔 함박눈 대신 스산한 겨울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출근길을 적시었던/ 때 아닌 겨울비가/ 깊은 밤 뒤늦은 귀갓길 광장에/ 번들번들 스며들고 있다//가까스로 빗방울을 털어낸/ 고단한 발길들/ 승산 없는 생의 승부수를 걸어놓고/ 총총히 빠져나간 불빛 흐린 전철역사//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듯/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얼어붙은 노숙자의 잠자리를/ 실금실금 파고들고// 정해진 궤도를 따라 달려온/ 마지막 전동차/ 비 젖은 머리통을 숨 가쁘게 들이밀고/ 들어온 야심한 밤// 생이 무언지 제대로 젖어보지 못한/ 우리들의 겨울날은/ 때아닌 겨울비와 통정을 하며/ 또다시 하룻밤 동면에 들어가고 있다”(‘동면’)

정세훈 시인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동면에 들어간 듯이 보이는 삶에서도 신생의 힘이 잠재해 있음을 투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늘 내 귀밑머리에 앉아 있다/ 보이지 않는 사상이 늘 내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다”(‘보이지 않는 것’)고 말한다.

“나의 생이여 즐거운가 그렇다면 그 즐거움은/ 단풍 들 때 동맥 끊듯 끊어지거라/ 행여 도적같이 지나온 전생이었든/ 혹여 찰나같이 닥쳐올 내세이던/ 차마 하지 못하고, 못 할 사랑/ 엉겁결에 저질러놓고/ 행복에 겨워 있다면 그 행복 단풍 들 때/ 가을볕 수수 모가지 잘라지듯 잘라지거라/ 천상의 고통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지상의 고통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그리하여 머지않아 발가벗겨질 온 천지가/ 울긋불긋 울긋불긋 단풍 들 때/ 나의 생이여 아름다운가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은/ 단풍 들 때 마른 지상에 물 번지듯 지워지거라”(‘단풍 들 때’)

‘단풍 들 때’에서는 고단한 노동자 생활과 고통스런 지병으로 오랜 병상을 떨구고 일어난 시인 스스로의 삶의 원숙함이 묻어난다.

시는 어떤 대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보기 위해 마음을 다할 때 형성되기 시작한다. 시 쓰기란 보이지 않는 것, 잠재해 있는 것이 우리 삶과 세계를 지탱하고 형성하는 지반이자 힘임을 시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사상”과 “보이지 않는 바람”이 마음과 감각을 저변에서 지탱하고 형성하는 힘이라는 것을 인식하듯이 말이다.

아홉 번째 시집 ‘동면’을 펴낸 정세훈 시인.
정세훈 시인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한겨울의 삶, 그리하여 동면에 들어간 삶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잠재성-신생을 가져올 봄-을 포착하고 인식하고자 한다.

시집 ‘동면’은 시인의 그 잠재성의 인식을 향한 시적 여정이 담겨 있는 시집이다.

“지상의// 새 떼가 다급히 어디론가 날아간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뱀들이/ 떼를 지어 밖으로 기어 나온다/ 잉어들이 자꾸만 물 위로 뛰어오른다/ 개들이 한꺼번에 마구 짖어댄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깊숙한// 지구 내부에서// 험한/ 지진과 해일의/ 전조현상이/ 꾸물꾸물 일어나고 있다”(‘본질’)

이성혁 평론가는 해설에서 “동면에서 깨어나 새로이 산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면서 어떤 악조건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열매를 맺으며 숲을 이룬다는 것은 사막과 같은 세상을 전복할 세계 내부의 잠재성이 땅 위로 현실화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며 “그것은 또한 세계의 ‘본질’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평했다.

19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정세훈 시인은 지난해 고향에 국내 최초의 노동문학관을 건립해 주목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 후 소년노동자가 되어 소규모 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인이 되었다.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 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포엠 에세이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산문집 ‘파지에 시를 쓰다’, 그림책동화 ‘훈이와 아기제비들’ 등을 간행했다.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과 제1회 충청남도올해의예술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천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공동추진위원장, 박영근시인기념사업회 운영위원, 위기청소년의좋은친구어게인 이사, 소년희망센터 운영위원, 인천시문화예술진흥위원회 위원, 인천민예총 이사장, 황해평화포럼 평화인문분과 위원, 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타 충남지회장, 노동문학관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정진 선임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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