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심장이 터진다.. 전기기타 박살내는 '파괴의 예술'

임희윤 기자 2021. 2. 1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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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내내 100만 원짜리 기타로 연주하다 마지막에 슬쩍 바꾸는 거지. 마지막 곡 남기고 5만 원짜리로."

열광하는 관객을 앞에, 난타되는 드럼을 뒤에 둔 채 냉정한 외과의사처럼 천천히 기타 줄을 해체한 뒤 고가의 기타 몸통을 바닥에 메다꽂는 상상. 안 해봤다면 가짜 로커다.

수백 대의 기타로 만든, 내가 본 가장 쿨한 기계 무덤.

7일(현지 시간) 미국 TV에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피비 브리저스가 공연 말미에 전기기타를 스피커에 내리꽂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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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0일 수요일 맑음. 파괴의 미학.
#341 Phoebe Bridgers 'I Know the End'(2020년)
최근 미국 가수 피비 브리저스가 NBC TV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해 기타를 부순 장면. 록 공연의 시청각 활극에서는 때론 파괴도 미학이 된다. 유튜브 화면 캡처
임희윤 기자
“한 시간 내내 100만 원짜리 기타로 연주하다 마지막에 슬쩍 바꾸는 거지. 마지막 곡 남기고 5만 원짜리로….”

학창시절 라이벌 밴드의 기타리스트 A는 그날따라 이탈리아를 치고 온 나폴레옹 같았다. 얼마 전 무대 위에서 전기기타를 부쉈노라고, 무용담에 비결까지 덧붙여 들려준 것이다. 내 명치 끝에선 뜨끈한 동경(憧憬)의 수프가 한 솥 끓어올랐다.

기타 파괴는 기타 키드의 절대 로망이다. ‘예쁜 여자친구와 빨간 차도 갖고 싶었지만’(이승환 ‘Dunk Shot’) 단 하나의 소원을 그만 덩크슛으로 고를 수밖에 없었던 농구 마니아의 심정이 이와 다를까. 공연의 피날레. 열광하는 관객을 앞에, 난타되는 드럼을 뒤에 둔 채 냉정한 외과의사처럼 천천히 기타 줄을 해체한 뒤 고가의 기타 몸통을 바닥에 메다꽂는 상상…. 안 해봤다면 가짜 로커다.

현대적 기타 파괴의 아버지는 1960년대 영국 그룹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다. ‘뮤즈’의 매슈 벨러미는 기네스 기록을 갖고 있다. 단일 순회공연에서 무려 140대의 기타를 부순 기록. 서울 잠실에서도 숫자를 추가했다.

2004년에 방문한 미국 시애틀의 음악 박물관 ‘익스피리언스 뮤직 프로젝트’(EMP·현 MoPOP)를 못 잊는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우주선 같은 외관도 폼 났지만 1층 로비에 들어찬 기타의 탑은 더 죽였다. 수백 대의 기타로 만든, 내가 본 가장 쿨한 기계 무덤. ‘다다익선’(백남준)의 기타 버전인 셈이다.

그곳 최고의 전시물 역시 부서진 기타 조각. 영국 밴드 ‘더 클래시’의 ‘London Calling’(1979년) 앨범 표지는 베이스기타를 무대에 막 메다꽂으려는 순간을 담은 사진인데, 이 박물관은 그 결과물, 즉 바로 다음 순간에 실제로 박살난 기타의 조각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기타 파괴 이야기가 들려왔다. 7일(현지 시간) 미국 TV에 출연한 싱어송라이터 피비 브리저스가 공연 말미에 전기기타를 스피커에 내리꽂은 것이다. 비싸 보이던데…. 며칠 뒤 후일담을 듣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브리저스의 퍼포먼스는 기타 제조사와의 협의하에, 껍데기뿐인 가짜 스피커에 내려치는 식으로 사전 기획된 것이라고 했다. 내 돈은 아니지만 다행이다. 반세기의 전통을 지닌 저 괴팍한 파괴 예술을, 난 언제까지나 지지할 것이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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