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간의 플라스틱 일기 작성이 남긴 '현타'
왜 이런 포장재를 썼는지 의문
다른 방법 없나 고민돼
분리배출해도 소각·매립되기 쉬운
'아더' 플라스틱 정말 많더라
"기업은 기술 개발 더 해야 하고
정부는 공공 선별장부터 늘려야"
투명 페트병도 라벨 안 뜯어져
코팅된 종이는 재활용 안 되고
무료나눔 거부당하는 아이스팩
"안써도 되는 플라스틱
기업이 알아서 빼는 노력부터"
기자는 결혼 6개월차 2인 가구다. 코로나19로 일주일에 절반 이상 재택근무 중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두달간 서울환경운동연합이 기획한 온라인 실천 캠페인 ‘플라스틱 일기’에 참여했다. 참여자들은 매일 자신이 ‘만든’ 플라스틱 쓰레기를 사진으로 찍어 해시태그(#플라스틱일기)와 함께 에스엔에스(SNS)에 올렸다.
기자는 일회용컵 대신 텀블러를 쓰고 가급적 빨대는 쓰지 않는다. 가방엔 늘 장바구니와 손수건이 있는, 나름 ‘에코’한 직장인이다. 입사할 때 만든 이메일(ecowoori)도 그런 의미를 담았다.
하지만 습관의 벽은 견고했다. 플라스틱 일기를 쓰는 동안에도 플라스틱 쓰레기를 정말 많이도 내다 버리고 있었다. 일종의 ‘현실 자각 타임’(현타)이 왔다. 왜 이런 포장재를 써야 했는지 의문이 들고, 그 이후에는 다른 방법은 없는지 기업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봤다.
라면이나 과자를 담은 비닐 포장재, 샴푸나 화장품이 든 각종 플라스틱통 쓰레기는 끊이지 않고 일기장을 채웠다.
골치 아픈 것은 ‘아더’(OTHER)였다. 모든 플라스틱 제품에는 어떤 재질인지가 표시돼 있다. 고밀도폴리에틸렌(HDPE), 저밀도폴리에틸렌(LD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에틸렌(PE), 폴리스티렌(PS), 폴리염화비닐(PVC)이 표시됐다면 단일성분 플라스틱이 쓰였다는 뜻이다.
반면 ‘기타’라는 뜻처럼 아더는 둘 이상의 이런저런 플라스틱 성분이 섞였거나 종이와 금속이 코팅된 복합재질을 뜻한다. 단일성분이 아니면 재활용률이 떨어진다. 집에서 애써 분리배출해도 재활용 선별장에 가면 으레 매립되거나 소각될 운명이다. 허승은 녹색연합 활동가는 “아더는 선별해도 저급한 재생원료가 된다. 보통 한국은 일본에서 고급 재생원료를 수입해왔는데, 재활용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단일재질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문제는 플라스틱 쓰레기 중 아더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햇반 그릇, 화장품 뚜껑만이 아니다. 머리와 몸통이 제각각인 경우가 특히 그렇다. 치약 뚜껑은 PP지만 치약 몸체는 아더인 식이다.
집에서 내다 버린 비닐의 상당수도 아더였다. 라면 봉지, 과자 봉지, 핫팩 비닐, 아이스크림 포장 비닐이 죄다 아더였다. 콩나물 포장 비닐, 생수병 라벨, 테이프 포장지는 PP인데 왜 이들 식품 봉지는 하나같이 아더일까.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식품을 안전하게 보관·유통하기 위해 산소 투과를 막는 필름 등이 추가되기 때문에 아더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은 99%가 단일성분이어도 1%만 다른 플라스틱이 쓰이면 아더로 분류하기 때문에 유독 아더가 많다. 홍 소장은 “외국처럼 가장 많이 사용된 대표 플라스틱 재질을 앞세워 단순하게 표기하면 재활용률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기업이 제품 생산 단계부터 재활용을 염두에 두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직은 생분해 기술이 불완전하다. 당장은 재활용 선별장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를 되살리는 노력이 중요하다.
환경단체들은 주로 민간 위탁인 재활용 선별장을 공공에서 직접 운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손으로 직접 분류하는 작업이 불가피한 선별장 특성상 많은 인원이 필요한데, 영세한 업체들이 다수이다 보니 자연스레 재활용이 가능한 것도 그냥 버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선별장을 공공이 운영하는 곳은 강북구(직영)와 성동구(공영)뿐이다. 김현경 서울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민간 위탁 선별장 중 5인 미만 사업장이 45% 이상이다. 실질 재활용률을 높이려면 이들 시설을 공공에서 직접 운영해 환경을 개선하고, 지금처럼 선별작업 이전 반입량이 아닌 최종 선별작업 뒤의 결과물로 선별장을 평가해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리배출을 의무화하고 있는 투명 페트병은 재활용률이 가장 높은 양질의 플라스틱이다. 환경부는 불투명한 막걸리병이나 음료수병도 올해부터 투명하게 바꿔가기로 했다.
투명 페트병을 분리배출하려는 의지가 충만한 소비자들마저 좌절하게 하는 것은 라벨이었다. 접착제로 붙여놔 잘 벗겨지지 않고 어렵사리 뜯어내면 지저분한 라벨 흔적이 덕지덕지 남는다. 지난해부터 투명 페트병으로 바뀐 서울 장수막걸리가 그렇다. 재활용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업체 쪽은 “열알칼리성 분리접착제를 사용해 재활용 우수 등급을 받았다”고 했지만, 정작 라벨 흔적은 80도의 높은 온도와 수산화나트륨에 의해서만 지워지기 때문에 분리배출 효과가 낮다.
라벨이 껌딱지처럼 딱 붙은 약통은 애물단지였다. 대형마트에서 과일을 담아 파는 투명 플라스틱 상자에 붙은 가격 라벨도 마찬가지였다. 수입 과자의 경우 제조업체가 붙인 상표 라벨은 페트통에서 손쉽게 떨어지는데 정작 국내 수입업체가 붙인 원산지표시 라벨은 따뜻한 물로 불려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페트병에 라벨을 접착하지 않고 팽팽하게 둘러 당긴 뒤 라벨끼리만 붙여놓거나, 아예 라벨 없이 출시된 페트병 제품을 버릴 때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러니 남의 일기를 베껴 쓴 것처럼 비슷한 내용이 많았다. 한 플라스틱 일기 참여자는 “용기에 붙은 스티커는 물에 불렸는데도 절대 떼어지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환경부는 다음달 말부터 재활용 쉬움 정도에 따라 재활용 등급 기준을 최우수·우수·보통·어려움 4개로 나누기로 했다. 라벨이 벗겨지지 않는 등 재활용 ‘어려움’ 등급을 받은 제품은 이 내용을 의무적으로 표기하도록 할지를 논의 중이다.
조미김처럼 하나하나 소포장한 제품을 사서 쓰고 버릴 때가 있다. 1인, 2인 가구가 늘어난 사회 변화가 그 안에 있다. 대용량으로 사면 다 먹지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된다. 그렇다고 소용량을 사면 포장재인 플라스틱 쓰레기가 무더기로 발생한다.
한살림 등 생활협동조합은 김, 달걀처럼 부스러지거나 깨지기 쉬운 물건을 보호하는 플라스틱 트레이나 덮개를 없애도 파손 등 문제는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다. 단, 종이 포장도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코팅 종이는 재활용이 안 된다. 포장재를 쓰지 않는 제로웨이스트 매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직 그런 매장은 드물다. 역시 생산 단계에서 플라스틱을 줄여야 한다. 홍 소장은 “기업이 그동안 플라스틱 트레이를 써서 용량을 부풀려온 측면도 있다. 안 써도 되는 플라스틱은 기업이 알아서 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택배와 함께 쌓여가는 아이스팩도 골칫거리였다. 환경부 분리배출 지침을 보면 아이스팩은 겉(비닐)과 속(합성수지물질)의 재질이 다르다. 곧장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합성수지 물질을 그대로 버리는 것은 환경오염으로 이어진다.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는 나의 ‘무상 기부’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중고물품을 거래하는 ‘당근마켓’도 나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지 못했다. “아이스팩 무료나눔” 게시글을 올렸지만 끝내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아이스팩의 지방정부 수거·관리 방안을 검토하라고 했지만 수거함을 운영하는 기초지자체는 전국에 12곳뿐이다.
기자처럼 플라스틱 일기를 쓴 사람은 4956명이다. 인스타그램 게시물만 3만개가 넘었다. 여성이 90%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20~30대 여성이 72%였다. 이들은 일기를 쓰며 플라스틱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잘 알게 됐고, 적극적으로 실천하겠다고 했다. 캠페인을 진행한 오신혜 서울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동물을 착취하는 패션의 잔혹함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모피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듯, 플라스틱을 사용한다는 게 인류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 있는 행위라는 부정적 인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는 탈플라스틱 시대를 열 수 있을까. 마침 여러 기업이 ‘플라스틱 프리’ 선언을 하고 있다. 14년째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허승은 녹색연합 활동가는 “씨제이제일제당의 스팸 뚜껑을 수거하고, 매일유업 제품에서 빨대를 없앤 것 모두 시민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을 통해 환경 감수성이 확대되는 흥미로운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했다.
서울환경연합은 오는 22일부터 플라스틱 일기 2탄인 ‘제비(제로웨이스트+비건)의 삶’ 캠페인 참가자를 모집한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제로웨이스트와 채식을 의미하는 비건을 실천하는 삶을 시도하는 이들과 전국의 제로웨이스트샵과 비건 식당을 방문하며 함께 지도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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