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싱가포르 합의' 왜 계승하라는 거야? [한반도 갬빗]

2021. 2. 1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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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조 바이든 미국 신 행정부의 북미대화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이뤘던 성과를 계승해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트럼프 정부에서 있었던 싱가포르 선언은 비핵화와 또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위해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1월 18일 신년기자회견 발언)

조 바이든 미국 새 행정부가 대북정책을 본격적으로 재검토에 나서자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의 계승 필요성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자문해온 전문가들 역시 바이든 행정부의 ‘김정은·트럼프 싱가포르 합의’ 계승을 강조했다.

북미 간 비핵화 합의는 싱가포르 합의 이전에도 여럿이 있었다. 그런데도 유독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장 바이든 행정부의 주요 외교안보라인은 싱가포르 합의가 1994년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나 9·19 공동성명과 후속 이행합의들보다도 퇴보했다고 주장하는데 말이다.

북한식 비핵화 구상이 담긴 싱가포르 합의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는 북한이 추구하는 비핵화 방법론을 반영한 사상 첫 합의다. 그동안의 북미 합의에는 미국이 추구하는 북한의 비핵화 방향이 제1조항으로 담겼다.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는 다르다.

이전까지의 북미 합의들은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취하면 미국이 제재를 완화하고 북한과의 관계를정상화하자고 하고 있다. 반면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는 ‘북미 간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 구축 작업을 하면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게 골자다.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비핵화 조치 →체제보장’이 아닌 ‘체제보장→비핵화’ 구조를 기본적으로 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인식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과 그렇게 합의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북미정상 합의를 계승하지 않으면 북한은 미국에 속았다고 생각하고 무력도발을 내세운 대미 강경책을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의 인식은 싱가포르 정상합의 이후 이뤄진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싱가포르 합의 직후인 2018년 7월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을 방문해 비핵화 협상을 진행했다. 북한은 제재완화와 관계정상화를 기대했지만 미국은 검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를 먼저 요구했다.

이후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폼페이오 장관이 “강도적 요구(gangster-like) 요구만 쏟아냈다”며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선(先) 비핵화 접근’ 무용론과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접근법

문재인 대통령은 왜 북한의 입장이 반영된 싱가포르 합의를 바이든 행정부가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일까. 그동안 미국이 채택해온 ‘선(先) 비핵화 후(後) 관계개선·체제보장’ 접근이 북한을 완전한 비핵화로 끌어내지 못했고 되레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를 초래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있다.

정세현 민주평화통일 수석부의장은 헤럴드경제에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는 북한에 먼저 행동을 요구하는 식의 합의를 추진하면 안된다는 반성에 근거한 것이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도 최근 강원대학교 ‘미국 바이든 시대 개막과 한반도 정세’ 기조연설에서 “(바이든 행정부에도)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한 것이나 마찬가진데, 먼저 해체하라고 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중략)…단계적인, 동시교환, 원칙에 따른 외교협상을 전개해야 한다는 시각인데, 이 시각은 한국 정부의 시각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제 역으로 질문을 해보자.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면,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서는 북미 싱가포르 정상합의를 계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싱가포르 합의에는 북미가 관계 정상화·한반도 평화체제 구축·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노력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그 뜻만 받아들이면 합의를 계승하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을까?

그래픽=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문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다. 미국은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가 진실하다고 보지 않는다. 당장 미 국무부는 논평에서 “북한의 핵·탄도 미사일과 관련 고급 기술을 확산하려는 의지는 국제평화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고 지구적인 비확산 체계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북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후보 토론회 당시 발언도 비핵화 조치가 없는 북미 대화는 오히려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2018년 북미 싱가포르 합의과정에서 실무 협상에 참가했던 랜들 슈라이보 전 국방부 차관보도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를 여전히 목격하지 못했다. ‘관여'를 생각하기에 앞서 최대한의 대북 압박 정책을 새롭게 펼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했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 내부는 크게 대북 강경파와 대북 관여파, 그리고 현상유지 및 위기관리파로 나뉘어 대북정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신뢰 수준에 따라 시각이 크게 나뉘었다.

대북강경파는 지정학적 관계를 이유로 그동안 북한에 대대적인 압박을 가하지 않아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단순 경제제재를 넘어 외교·군사·인권 분야에서의 대대적인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북 관여파는 북한의 관계개선을 비핵화 협상의 입구로 삼고 비핵화를 결과로 보는 접근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과의 인적 교류를 확대해 핵을 굳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인상을 심어줘야 한다고 본다.

현상유지 및 위기관리파는 북핵문제가 복잡한 만큼 당장의 성과를 취하기 어렵다고 보고, 북한의 핵무기 수출 및 확산을 차단하는 선에서 상황을 관리하는 게 최선이라고 바라본다.

결국 북미 싱가포르 정상 합의의 계승 여부는 바이든 외교안보 라인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갈지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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