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2000원으로 즐기는 낭만..'청춘극장'은 상영중

류인하 기자 2021. 2. 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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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서울 중구 문화일보홀에 위치한 ‘청춘극장’. 류인하 기자

“이 영화는 아주 명작이야.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거든. 미국에 정착한 부부가 자식을 여섯을 낳았는데 둘 다 죽어버려. 엄마의 유언에 따라 첫째가 남은 다섯 형제들을 한 명씩 다른 집에 입양을 보내는 슬픈 내용인데 참 잘 만들어졌어.”

지난 5일 서울 중구 ‘청춘극장’ 앞. 기자가 극장 한 쪽 벽면에 붙은 상영작 포스터를 살펴보자 파란 조끼를 입은 안내도우미 어르신이 영화 줄거리를 설명했다. 글리니스 존스, 카메론 미첼 주연의 영화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All mine to give)>다.

청춘극장은 꽤나 한산한 모습이었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이른 오전부터 극장을 찾은 관객들로 붐볐지만 코로나19의 여파는 강했다. 이날 극장엔 영화 한 편 상영 때마다 관객은 7~10명이 전부였다.

10일 서울시에 따르면 청춘극장은 지난해 2월22일부터 올해까지 총 4차례에 걸쳐 218일간 휴관했다. 가장 길게 휴관한 기간은 75일에 달한다. 청춘극장 입장에선 코로나19 취약계층인 70~80대 어르신들이 주 관객층인 극장 특성상 “극장으로 와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상영관 안 좌석들엔 하나 걸러 ‘접근금지’ 띠가 둘러져 있었다. 발권된 좌석과 관계없이 관객들은 알아서 띄엄띄엄 자리를 찾았다. 1층과 2층 객석이 가득 찰 정도로 관객이 몰리기도 했었던 코로나19 이전 상황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었다.

청춘극장은 55세 이상 어르신들을 위한 전용극장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외국영화를 주로 상영한다. 저작권이 소멸된 1962년 이전 외국 고전영화들이 전체 상영작의 56%를 차지한다. 현재 70~80대인 어르신들이 젊은 시절 봤거나 놓쳤던 그 시절 외화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물리적(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에 따라 상영관 안 좌석 당 1개씩 접근금지 띠가 둘러져 있다. 류인하 기자

청춘극장은 영사실장도, 매표보조원도, 위생관리원도 모두 65세 이상 어르신이다. 파란 조끼를 입은 안내 도우미요원 10명도 모두 어르신이다. 극장을 운영하는 23명의 직원 가운데 18명이 65세 이상 어르신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모두 정규직이다.

지난 5일 청춘극장의 상영작은 록 허드슨·시드 채리스 주연의 1958년 개봉작 <내 사랑 황혼에 지다(Twilight of the Gods)>였다. 보편적 사랑이야기를 기대했을 수 있지만 영화에서 ‘내 사랑’은 주인공이자 승객을 태운 배를 침몰시킨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돼 전역한 전 해군장교 선장 벨(록 허드슨)이 몰던 낡은 배 한 척이다. 죄책감으로 술에 의지하는 삶을 살던 벨의 선박에 수상한 여성(시드 채리스)과 선교사, 사업가, 공연가수 등이 탑승한다. 배의 목적지는 멕시코였지만 폭풍우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선원들은 목적지를 호놀룰루로 돌리려 음모를 꾀하고, 승객을 구하기 위해 벨 선장은 마지막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배는 그의 선택에 따라 황혼 속으로 사라진다.

영화관 앞 대기실에는 상영 전부터 영화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청춘극장 직원들 사이에서 ‘꺽다리 아저씨’로 불리는 한 관객은 “이 영화 참 좋다”며 직원들에게 줄거리를 늘어놓았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둔 상태에서 대화를 나눴지만, 이들에게 청춘극장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랑방’이었다. 이곳의 직원인 또 다른 어르신은 “설 연휴에도 영화를 상영한다”며 “올 명절은 어디 갈 곳도 없는데 이곳에서 영화나 보고 가시라”고 말했다. 2월 10~11일 상영작은 빙 크로스비·그레이스 켈리 주연의 <상류사회>다.

이곳의 영화 한 편 당 관람료는 2000원이다. 제로페이로 결제하면 1400원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다. 수요공연과 토요공연은 각 1000원, 2000원이다. 어르신들이 경제적으로 큰 부담없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가격이다.

‘내 사랑 황혼에 지다’ 영화 속 한 장면.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머리카락을 엿가위로 잘라 다듬어 준다.
‘내 사랑 황혼에 지다’ 영화 속 한 장면. 선장 벨이 선교사와 불안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서울시는 각 자치구의 55세 이상 고령자 인구수에 따라 매월 4720매의 무료초대권도 배부하고 있다. 이 무료초대권은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들에게 지급된다. 청춘극장은 서울시의 수익사업이기는 하지만 사실 수익보다는 어르신들의 ‘보편적 문화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어르신들이 주로 이용하는 극장이라고 해서 젊은 청년층이 찾을 수 없는 공간은 아니다. 옛 영화를 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어르신 할인’이 되지 않은 관람료 7000원만 내면 된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같은 화질과 사운드, 좌석편의성은 없지만 그 나름의 낭만은 존재한다.

서울시는 앞으로 ‘청춘극장’의 기능을 기존 오프라인 영화 관람형에서 비대면 시대 맞춤형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기존의 영화상영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영상제공을 늘리기로 했다. 지난해 휴관기간 동안 청춘극장은 ‘청춘 안방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카카오TV 등 온라인 프랫폼을 통해 영화 및 기존 공연영상 각 3편씩을 업로드해 어르신들에게 제공했다.

이와함께 실생활에 필요한 어르신 맞춤형 교육강좌인 ‘청춘 인생학당’도 운영될 예정이다. 비대면 문화에 필요한 스마트폰 교육, 가수 현미와 함께하는 노래교실 등 프로그램을 개설해 매일 오고 싶은 공간 조성을 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원로 스타들로 구성된 ‘토요공연’ 등도 진행하기로 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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