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글로 배운 판결"..'에임핵'이 악성프로그램 아니라는 대법원에 의문 품은 판사

전현진 기자 2021. 2. 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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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내 업체인 펍지가 개발해 전 세계적 돌풍을 일으킨 1인칭 슈팅 게임 배틀그라운드.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8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320호 법정. “이게 흔히 말하는 게임을 글로 배운 판결 아닌가 싶습니다.”

재판을 진행하던 형사2단독 이동희 판사는 1인칭 슈팅 게임(FPS)을 플레이할 때 추가로 구동할 수 있는 자동 조준 프로그램인 일명 ‘에임 핵’ 판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모씨 사건을 심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선 유사한 사건에 대해 에임 핵이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악성 프로그램’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변호인과 검찰의 의견을 정리하면서 대법원 판례를 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건은 이랬다. 피고인 정모씨(30)는 2019년 3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공범과 함께 1인칭 슈팅액션 게임(FPS) 장르인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 ‘콜오브듀티’에 사용할 수 있는 일명 ‘에임 핵’(조준을 돕는 프로그램)을 2만9872차례에 걸쳐 디스코드나 텔레그램 등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팔았다. 챙긴 돈이 8억3149만여원에 달한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검찰은 정보통신망법상 악성 프로그램을 제작해 배포한 혐의로 기소했다.

에임 핵은 총기류 같은 발사 무기를 들고 상대방과 결투를 벌이는 FPS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FPS 게임은 이용자의 숙련도에 따라 3차원 게임 공간 속 캐릭터를 조정해 모니터 화면에 표시된 조준점을 빠르고 정확하게 컨트롤한 뒤 상대를 쏴 제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FPS 게임의 고수들은 발자국 소리나 오랜 게임 플레이로 기른 관찰력을 활용해 상대 위치를 파악한다. 또 순간적인 판단력과 정확한 컨트롤로 상대를 정확히 맞춰 쓰러트린다. 에임 핵은 이런 실력을 아무런 노력 없이 얻게 해준다. 부족한 실력으로 쉽게 죽고 마는 초보 게이머들 사이에선 에임 핵에 대한 유혹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핵쟁이’(에임 핵 사용자) 소리를 들어도 게임에서 승리하는 쾌감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에임 핵을 쓰는 상대를 이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오버워치는 2016년 5월 출시된 뒤 인기를 끌었지만 에임 핵이 퍼지면서 사용자들이 떠났다. 국내 업체인 펍지가 개발해 전 세계적 돌풍을 일으킨 배틀그라운드도 에임 핵 때문에 수많은 매니아들을 잃었다.

이 사건에선 에임 핵이 정보통신망법에서 규정하는 ‘악성 프로그램’인지가 핵심이다. 정보통신망법은 ‘정당한 사유 없이 정보통신시스템, 데이터 또는 프로그램 등을 훼손·멸실·변경·위조하거나 그 운용을 방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악성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한다. 그동안은 FPS 게임에서 상대방의 위치를 표시하고 직접 조작하지 않고 상대 주변에 총을 쏴도 자동으로 조준·타격되는 이런 ‘에임 핵’은 악성 프로그램이라고 보고 수사와 기소 대상이 돼 왔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게임 오버워치에 사용된 에임 핵을 ‘악성 프로그램’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대법원은 “(에임 핵이)본인 의사에 따라 이용자의 컴퓨터에 설치되고 그 컴퓨터 내에서만 실행되며, 데이터 또는 프로그램 자체를 변경시키지 않는다”며 “서버를 점거함으로써 다른 이용자들의 서버 접속을 어렵게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어 “상대방 캐릭터에 대한 조준과 사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줄 뿐”이라며 에임 핵을 일종의 ‘보조 프로그램’처럼 평가했다. 다만 “게임물 사업자가 제공 또는 승인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배포·제작하는 행위는 게임산업법 위반죄 등에 해당될 수 있다”고 했다.

정보통신망법은 악성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배포한 자를 처벌하지만, 게임산업법은 악성프로그램이 아니어도 게임사업자가 승인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거나 배포하면 처벌한다. 법정형 역시 정보통신망법상 악성프로그램 유포죄가 게임산업법상 미승인 프로그램 배포죄보다 높다

정씨 측 변호인이 대법원 판례를 들어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기소된 정씨에 대해 게임산업법으로 공소 사실을 변경해달라는 의견을 낸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검찰 측도 이 판례에 따라 게임산업법 위반으로 혐의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판사는 대법원 판단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이 판사는 “제 생각으로 조준과 사격을 더욱 쉽게 해줄 뿐이고라고만 돼 있는데, 그게 프로그램 조작·변경이 아닐까 싶은데요. 슈팅을 잘하는 사람이 레벨이 올라가는 게임인데, (에임 핵을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조작할 수 없을 테고, 결국 그 프로그램을 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이 판사가 “게임을 글로 배운 판결”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 건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이어 “본사 (서버상의) 프로그램 자체에 대한 건 아니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용자의 측면에선 프로그램을 조작하는 것은 되지 않느냐”라고 했다. 에임 핵 이용자의 상대 게이머 입장에서는 에임 핵 때문에 정상적인 프로그램 작동 환경이 아닌 상황에서 플레이하다 패배하게 된 것이니 결국 프로그램 조작이 이뤄졌다고 봐야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로 보인다.

“저도 안 해본 게임이라…. 어떻게 조작되는지 모르니 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이 판사는 법정에서 에임 핵 프로그램을 시연해보자고 했다. “게임을 직접 해볼 필요는 없겠지만, 게임은 시연이 돼야 하고 (에임 핵이)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을 봐야겠습니다.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법정에서 배틀그라운드가 플레이될 가능성이 생긴 셈이다.

“몸은 좀 괜찮아요?” 재판을 마치기 전 이 판사는 피고인석에 앉은 정씨에게 물었다. 정씨는 재판 내내 긴장된 듯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재판장님이 제 아픔을 고려해 주셔서 병원에 다니고 있고 약 먹고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씨는 잠시 머뭇거리다 씩씩하게 대답을 마무리했다. 정씨는 구속 기소 됐지만 최근 보석이 허가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다음 재판은 4월5일 열린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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