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정의용 취임에 즈음해 다시 보는 강경화 취임사

김혜영 기자 2021. 2. 1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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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의 부처 운영 청사진을 보여주는 첫 메시지는 바로 취임사입니다. 장관의 의지가 담긴 만큼, 향후 어떤 정책을 펼칠지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인데요. 같은 정권의 장관이라고 해도, 취임사가 비슷한 건 아닙니다. 취임사의 스타일이나 분량, 내용 모두 장관이 누구냐에 따라 확연히 다릅니다. 취임사 내용을 결과적으로 돌이켜보면, 일부는 현실이 되어 '업적'으로 남기도 하고, 또 일부는 '공수표'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 강경화 전 장관의 취임사

2017년 강경화 전 장관의 취임사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교부 직원들에 대한 상세하고 선명한 메시지였습니다. 특히 외교부 내부의 문제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었습니다. 강 전 장관은 "근무 기강과 긴장감, 전문성은 반드시 유지하되, 업무와 개인 생활 간 균형과 조화도 중시하고 격려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일하면서 세 아이를 키운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장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조직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강 전 장관의 의지는 실제 불필요한 대기성 야근과 주말 근무를 없애는 '성과'로 이어졌다는 게 내부 직원들의 평가입니다. 다만, 일부 재외공관에서 발생한 성 비위나 갑질 사건은 이 같은 조직문화 혁신 노력을 퇴색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강 전 장관은 또 "여성 직원의 입부 비율이 정부 전 부처 중 가장 높다"며 "건강하고 건설적인 양성평등 관점이 우리 부의 인사와 업무방식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인사 혁신도 추진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실제 강 전 장관은 외시 출신·남성 위주의 외교부 조직 스펙트럼을 넓혔습니다. 외교부 내 여성 과장 비율은 지난해 12월 기준 36.4%로, 지난 2017년 3월 13.1%보다 확연히 늘었습니다. 여성 고위공무원 비율도 2017년 3월 3.8%에서 지난해 12월 기준 6.7%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강 전 장관은 취임사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외교는 국민의 의지가 담긴 외교, 국민과 소통하는 외교"라며 "나라다운 나라의 외교"도 강조했습니다. 이는 재외국민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재외동포 영사국의 확대와 해외안전지킴센터 신설, 영사조력법 시행으로 이어졌고, 이를 두고 해외에 체류하는 국민들이 보다 체계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단 평가가 나옵니다. 강 전 장관은 취임사에서 "국회와 언론은 물론,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힘써나가겠다"라고 했고, 이는 지난해 초까지 최소 분기별로 1차례씩 내신 브리핑을 갖는 실천으로 이어졌습니다.


강 전 장관이 취임사에서 힘주어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북미 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강 전 장관은 취임사에서 "갈수록 고도화되며 시급해지는 북핵·미사일 문제는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제재와 대화를 모두 동원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취임사를 발표한 이후 싱가포르에서의 북미정상회담과 남북정상회담 등 역사적인 장면이 이어졌지만,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미 대화는 사실상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핵뿐 아니라 주요 외교안보 현안을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주도하면서 '외교부 패싱' 논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강 전 장관의 취임사 중 "인권과 인도주의를 증진해야 하는 국제 규범의 후퇴를 비롯한 범세계적 문제 등 수많은 도전에 맞서겠다"던 부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북핵 문제를 유리그릇 다루듯 해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따라, 강 전 장관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자리를 4년 가까이 공석으로 뒀습니다. 북한인권법에 따라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을 할 수 있는 본인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은 겁니다. 강 전 장관은 또 지난해 11월 북한의 조직적인 인권 침해를 규탄하는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 결의안 표결에서 '반대만 하지 않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인권 전문가들로부터 지적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9월 전 해양수산부 소속 공무원이 해상에서 북한군에 피격당해 숨진 사건이 일어난 상황까지 더해져 '지나친 북한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 정의용 장관의 취임사

그렇다면, 어제 취임한 정의용 장관의 취임사는 어땠을까요? 정 장관의 취임사는 개인적인 소회와 강경화 전 장관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로 시작됐습니다. 정 장관은 "문재인 정부의 첫 외교부 장관으로서, 첫 여성 외교부 장관으로서 대내외적 도전을 슬기롭게 대처해왔다"며 "강 장관이 시작한 외교부 혁신 과정은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 장관의 취임사에선 예상대로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대한 의지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정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실현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지난달 장관으로 지명된 직후 기자들에게 배포한 메시지는 물론 지난 5일 국회 외통위에서 강조한 메시지와도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한 외교부 당국자는 "정 장관이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직접 설계한 만큼 이를 본인의 소명으로 여기는 것 같다"며 앞으로도 조속한 북미 대화 재개에 상당한 비중을 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정 장관은 취임사에서 한국 외교가 처한 상황 인식도 밝혔습니다. 정 장관은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이 심화되고 있어 선제적이고 전략적인 외교가 요구되는 시점"이라며 그 해결책으로 앞서 강조한 '한반도평화프로세스'와 함께 ① 한미 동맹의 보다 건전하고, 호혜적이며, 포괄적인 발전과, ② 중국, 일본, 러시아, 아세안, EU 등과의 평화 번영을 위해 노력하며, ③ 선진국과 개도국을 잇는 중견국 외교를 지속하고, ④ 보건 협력과 세계 정세 회복, 기후변화, 민주주의와 인권, 비전통 안보 분야의 국제사회 노력에 동참하겠다는 총 4가지 노력을 거론했습니다.

정 장관은 특히 "외교관은 총 없는 전사"라고 한 故 박동진 장관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국가와 민족의 안위를 위하는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반드시 지녀야 할 자질로 전쟁에 뛰어든 전사에 버금가는 사명 의식"을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면서 "국민의 생명과 온전한 일상을 지키는 것이 외교의 진정한 가치"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와 '민족', '전쟁', '사명의식'까지 하나같이 무거운 표현들을 거듭하여 쓴 것만 놓고 봐도, 정 장관이 취임에 앞서 스스로 책무를 무겁게 느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강경화 전 장관의 취임사가 외교부 직원들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 성격이 짙었다면, 정의용 장관의 취임사는 한국이 나아가야 할 포괄적인 외교정책 기조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청자가 달리 설정된 느낌도 들었습니다.


강경화 전 장관이 강조했던 일과 가정의 양립, 외교부 내부의 조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강경화 장관이 시작한 외교부 혁신 과정은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이라며 전임 장관의 기조를 잇겠다는 언급이 전부였습니다. 정 장관의 취임사는 글자 크기 10포인트로 A4용지 1장 분량으로 간략했는데요. 이는 강 전 장관 취임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역대 외교부 장관들의 취임사와 비교해봐도 간결한 편이어서 정 장관의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생각이나 향후 정책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짧은 분량 탓인지, 통상적으로 취임사에 들어가곤 했던 '국민과의 소통' 대목이 빠진 점도 눈에 띄었습니다. 많은 역대 장관들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외교, 국민과 소통하는 외교를 취임사에 담곤 했습니다. 가령,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2004년 1월 외교장관 취임사에서 "우리 외교부는 국민들과 함께 하는 외교를 펼쳐야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윤영관 전 외교장관도 지난 2003년 취임사에서 "일반국민들의 광범위한 이해와 지지가 중요한 public diplomacy 시대를 맞아 평소보다 협조적이고 봉사하는 자세로 임해 주기 바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강경화 장관 역시 취임사에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국회와 언론은 물론,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힘써 나가야겠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무쪼록 정 장관의 간결한 취임사가 앞으로 어떤 정책으로 구체화될지, 그리고 그 구체화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 언론과의 소통은 어떻게 해나갈지 잘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진=연합뉴스)

김혜영 기자kh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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