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원의 지식카페> '디자인은 꼭 기능적이어야 하나'.. 천재 디자이너의 도발적 질문

기자 2021. 2. 1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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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메 아욘이 지난 2007년 밀라노 박람회 때 선보인 타일 브랜드 비사자 전시장 디자인. 타일로 장식한 대형 피노키오를 한가운데에 두고, 그 주변에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체스판의 말처럼 배치했다. 상품으로서의 타일을 보여주지 않고 타일로 거대 작품을 만든 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화병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컨버세이션 화병 (2010년).
22 암체어(2009년).
하이메 아욘(Jaime Hayon)

■ 최경원의 세상을 바꾼 디자인 - (3) ‘이상한 나라’의 하이메 아욘

사람 얼굴 새긴 컨버세이션 화병과 독특한 크리스털 캔디 세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유분방한 개성 담아

2007년 밀라노 박람회 ‘대형 피노키오’… 초현실적 오브제로 세계 디자인계 흐름 뒤집어

디자이너를 기업 안에서만 일하는 사람으로 많이들 생각하지만, 하이메 아욘(Jaime Hayon) 같은 사람을 보면 디자이너는 예술 속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디자이너들을 세상을 등지고 자기 세계에 빠져 있는 대책 없는 예술가로 보면 오산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자유롭고 독특한 예술적 세계로 대중을 강렬하게 매료시킨다. 오히려 기업이 그 뒤를 따르며 이윤이라는 열매를 거둬들이고 있다. 열매의 크기와 질은 디자이너가 대중을 얼마나 매료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는 디자이너가 예술가인 척이라도 해야 할 시대인 것이다.

아욘의 컨버세이션 화병을 보면 이런 것도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용도는 화병인데, 화병이라는 기능은 변명처럼 보이고 실제로는 사람의 얼굴이 들어 있는 병 모양의 이상한 조각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사면에 진지한 사람의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도자기 표면에는 아욘 특유의 드로잉이 그려져 있다. 역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충돌하면서 특유의 초현실적인 느낌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다. 좀 섬뜩할 수도 있는 이미지지만 얼굴 주변의 드로잉이 천진난만해 그런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오히려 유머러스해 보인다. 바로 그런 중의적이고 은유적인 모습이 많은 사람의 마음과 눈을 매료시킨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보는 사람의 잠재의식을 강렬하게 촉발시키는 이상한 느낌. 그다음부터는 이게 디자인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안 되고 그 이상한 느낌만 남아 계속 되돌아보게 만든다. 파블로 피카소나 후안 미로 같은 선배 스페인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초현실주의적 솜씨다. 그는 디자인으로 위장한(?) 이런 초현실주의적 오브제로 혜성같이 등장해 세계 디자인계의 흐름을 뒤집어 놨다.

크리스털 캔디 세트는 겉으로는 화병이지만 오브제적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까 이 디자인은 앞세우고 있는 용도에서부터 초현실적이다. 쓰임새가 없는 조형물은 조각의 영역에 속하지만, 아욘은 흐릿한 용도를 앞세우면서 순수한 자신의 조형적 세계가 표현된 이 오브제를 디자인이라고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기능이 희석된 그 틈새로 아욘 특유의 조형성이 스며들면서 그의 다중적인 초현실성이 표현되고 있다. 재료는 크리스털인데 모양은 캐릭터 같기도 하고 순수 미술작품 같기도 해, 하나의 형태에서 다양한 이미지가 우러난다. 그렇게 극한 대비와 중층적인 느낌들 때문에 이 투명한 오브제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끌어들이는 힘이 강하다. 그 결과 지극히 고급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예술적이고, 하지만 지극히 대중적인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다양한 이미지가 중층으로 돼 있어 어느 하나의 방향도 선택할 수 없는 그런 모호함이 이 디자인을 지극히 몽환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의 무의식이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기능적 배려가 희박한 물건을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유분방한 개성은 뚜렷하고 강하다. 그냥 보기에는 천방지축으로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일관돼 있고, 강렬한 이미지로 정제돼 있다. 순수미술이었어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몇십 년 전이었다면 이것은 디자인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많은 비판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디자인이 당당하게 디자인의 중심에 놓일 정도로 디자인의 지평은 넓어졌고, 수준도 높아졌다.

디자인을 이렇게(?) 해놓고도 아욘이 디자인계의 중심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것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당연히 아욘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며 수많은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 디자인이 기능을 추구해야 하고, 디자인은 기업 안에서 이뤄지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이런 괴상한 디자이너를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으니 더 머리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비교적 그의 초기작이랄 수 있는 세면대와 거울을 보면 독특하긴 하지만 생각보다는 좀 멀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심플한 모양이 무척 현대적이다. 산뜻한 이미지에 신뢰성을 주는 형태는 현대 디자인으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리의 곡선이나 모서리의 라운드 같은 부분에서 피어오르는 고전적인 우아함은 이 디자인을 현대에서 과거로 옮기고 있다. 다소 낯설 수 있는 현대적인 이미지에 익숙한 고전적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디자인에서 새로움과 익숙함, 세련됨과 깊이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에서 은근슬쩍 대중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폴트로나(Poltrona) 의자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나타난다.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이 의자는 대단히 현대적인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의자의 플라스틱 표면은 첨단 소재와 기술로 상징되는 현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마차의 덮개 같은 뚜껑이 달리고, 안쪽으로는 고급 쿠션에서나 볼 수 있는 볼록볼록한 가죽과 솜의 앙상블이 고전적인 풍모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가죽으로 마감된 의자의 안쪽은 스페인 귀족들이나 앉았음 직하다. 장식이 하나도 없는 심플한 형태에서는 현대성이, 우아하면서도 고전적인 구조에서는 전통적인 느낌이 이중으로 겹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현대성과 전통성이 부딪히는 가운데 아욘 특유의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잔뜩 만들어지면서도 대중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고전성이 그의 디자인의 난해한 예술이 사람들에게 어렵지 않게 다가가도록 하는 열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22개의 나무 부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22라는 이름이 붙은 암체어에서도 아욘 특유의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인 느낌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의자를 그냥 보면 평범한 고전적 의자처럼 보이는데, 휘어진 곡면으로 이뤄진 의자의 구조가 심상치 않다. 가느다란 선적 곡면으로 이뤄진 몸통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나무가 아니라 금속 주조로 만들어진 것처럼 다이내믹하다. 나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려운 형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고전적이지만 매우 미래적인 느낌을 준다. 비밀은 이 의자의 휘어진 곡선의 구조가 한 덩어리의 나무를 깎아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휘어진 모양의 나무 조각 22개를 이어 붙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만들어지기 어려운 형태가 나무로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래서 의자에 고전적이면서도 미래적이고 이국적인,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표현될 수 있었다. 어쨌든 의자 전체를 감도는 고전적인 이미지는 이 예술적인 의자를 사람들이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게 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예술성만을 향해 앞뒤 안 보고 달리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매우 주도면밀하게 사회와 호흡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장시키는 영리한 디자이너인 것이다.

2007년 밀라노 박람회에서 아욘은 비사자라는 타일 브랜드의 전시장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가운데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피노키오를 놓고, 그 주변에 자기의 작품을 체스판의 말처럼 배치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어모았다. 타일 회사를 홍보하는 전시장인데, 상품으로서의 타일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타일로 거대한 조각을 만들어 놨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관람객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줬다. 초현실적인 예술성을 통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디자인인가 예술인가의 논란은 뒤로하고서라도 이런 충격적인 초현실적 이미지는 그의 명성이 왜 세계적인지를 의심치 않게 한다.

아욘은 스페인의 전통으로 이런 혁신적인 디자인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런 전통의 신뢰가 없었다면 아마 아욘의 디자인은 그저 희한하게 생긴 순수미술 같은 디자인에 그쳤을 것이다. 아무리 파격적이고 현대적인 척(?)을 해도 그는 어쩔 수 없이 안토니오 가우디나 피카소와 같은 핏줄이란 것을 디자인을 통해 느낄 수 있다. 단지 예쁘거나 기능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탁월한 아이디어, 끝까지 놓치지 않는 클래시컬한 분위기, 그리고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은 그의 디자인은 그동안 디자인계에서 부족했던 꿈을 수혈해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디자인이 꼭 기능적이어야만 할까? 디자인이 꼭 상업적이어야만 할까? 아욘의 디자인들은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그동안 건조한 현실 속에 부대끼며 꿈을 꾸지 못했던 우리에게 풍요로운 꿈을 불러일으킨다. 이 정도면 세계적인 디자이너라는 작위를 받을 만하지 않을까.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 하이메 아욘(Jaime Hayon)

- 1974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생

- 10대에 스케이트보드 문화와 그라피티에 심취함

- 1996년 마드리드에 있는 디자인 학교(Instituto Europe di Design) 졸업

- 1997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립 고등장식미술학교(E.N.S.A.D.) 졸업

- 1997년 베네통이 세운 디자인 학교 파브리카(Fabrica)에 들어가 과 대표로 숍과 레스토랑, 전시회 콘셉트, 그래픽 디자인 등 프로젝트 진행

- 2000년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2003년부터 다양한 디자인을 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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