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죄라고 꼭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 (12)]
2021. 2. 10. 09:51
[주간경향]
판사가 쓰는 법률 용어가 시민에게는 주술사의 주문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유명 정치인에 대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한 뒤 영장을 발부하는 ‘영장전담판사’는 언론이 단골 소재로 다루어서인지 많이 알려졌다. 영장심사는 판사가 하는 일의 1%도 안 된다. 선진국에서는 상세하게 보도하는 것이 드문 점에 비춰 확실히 이례적이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의 현실이고, 문제의 본질이다.
판사가 쓰는 법률 용어가 시민에게는 주술사의 주문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유명 정치인에 대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한 뒤 영장을 발부하는 ‘영장전담판사’는 언론이 단골 소재로 다루어서인지 많이 알려졌다. 영장심사는 판사가 하는 일의 1%도 안 된다. 선진국에서는 상세하게 보도하는 것이 드문 점에 비춰 확실히 이례적이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의 현실이고, 문제의 본질이다.
조선시대 원님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듯, 죄인을 가두고 조사하고 형을 정했으므로 영장이라는 말이 아예 없었다. 일제는 포악하게 식민 통치를 하기 위해 검사나 경찰관이 영장 없이 바로 구속할 수 있도록 했다. 악질 순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조선사람을 잡아넣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도 검사의 승인만으로 구속이 이루어지고, 판사가 영장을 심사하는 제도가 없다. 해방 후 미 군정하에서 처음 영장제도가 도입됐고, 계속 시행하고 있다. 다만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수사서류만 보고 영장을 발부할지 결정했으므로 피의자가 판사에게 직접 말할 기회가 없었다. 1997년 1월부터 구속영장 실질심사제도가 채택됐다. 한국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판사가 법정으로 피의자를 불러 변명을 듣고 구속 여부를 결정하게 됐다. 처음에는 판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에만 실질심사를 했다. 2008년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모든 피의자에게 기회를 줬다.
무죄추정 원칙과 불구속수사 원칙
어느 시대든 수사기관 앞에 홀로 선 범죄 혐의자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해진다. 엄청나게 기울어진 조사실에서 수사기관이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수사에 관여하지 않은 판사가 발부한 영장 없이는 피의자를 구속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영장주의).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재판이 확정될 때까지 무죄로 추정되므로(무죄 추정 원칙), 수사기관은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는 것이 원칙이다(불구속수사 원칙). 다만 피의자가 도중에 도망가거나 증거를 없애거나 조작한다면 수사나 재판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런 위험성이 있는 경우만 판사에게 영장을 받아 구속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한 해 구속되는 사람은 몇명일까요? 시민은 물론 법학교수나 법조인도 제대로 맞히지 못한다. 6만여명인데 이것도 많이 줄어든 수치다. 1997년 전에는 한 해 12만~13만명 정도 구속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검사는 조금이라도 사안이 무거우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당직 판사는 구속사유가 있는지 따지지 않고 관행적으로 90% 이상 영장을 발부했다. 심지어 4주 상해나 6주 교통사고를 저지른 사람도 구속됐다.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물어보나 마나다. 가족들은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합의금을 마련하고, 사돈의 8촌까지 경찰이나 검사와 연줄이 닿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브로커나 전관 변호사에게 거액의 착수금을 건네고 성공보수금을 약속했다. 피의자는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빨리 석방되길 바라고 때로는 범하지 않은 죄까지 자백했다. 검사는 10~20일 구속하다가 7만~8만명을 풀어주면서 기소를 유예하거나 벌금형의 구약식 또는 불구속으로 기소했다.
이런 상황을 언론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는 ‘전관예우’라고 비난했고, 전문가들은 ‘인질사법’이라고 비판했다. 법원은 판사가 당직날 야간에만 영장을 심사하는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1997년부터 영장사건만 맡아 심사하는 영장전담판사를 배치했다. 영장전담판사가 꼼꼼하게 심사하면서 영장발부율은 80%대로 감소했다. 검사도 영장 청구를 자제했다. 2019년 한 해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은 2만9646명이 청구되고 2만4044명이 발부됐다. 수사단계에서 구속되는 사람이 25년 전보다 4분의 1 이하로 대폭 줄어든 것이다. 다만 판사가 한 해 재판 도중 구속(법정구속)하는 사람은 3만7000명으로 늘어났다.
영장 발부할 때 ‘범죄의 중대성’ 고려
학생이나 시민을 상대로 법률강연을 나가면 구속에 관한 질문이 많다. 그래도 사안이 무거우면 구속해야 하지 않을까? 형사소송법도 시민의 법감정을 감안해 영장을 발부할 때 ‘범죄의 중대성’을 고려하라고 규정한다. 판사도 잔혹하게 사람을 죽인 범인을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석방하지는 않는다.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는 피의자와 사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단일한 기준을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고려 요소가 무엇인지는 많이 논의됐고, 법원 내부에 관련 예규가 있다.
그동안 검사의 영장청구 기준은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최근 검사와 경찰의 견해 차이를 조정하는 ‘영장심의위원회’가 도입됐다는데 앞으로 어떻게 운영될지 주목된다. 구속되면 구치소에 가니까 형벌이 아닐까? 형벌은 판사가 선고하면서 부과하는 것이므로 구속은 법적으로 형벌이 아니다. 다만 수사 초기단계에 갇힌 피의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고 나중에 구속된 기간만큼 형에서 빼주므로 형벌로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많이 구속되는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차별이 아닌가? 일정한 주거가 없는 경우 법에 따라 구속하는 것이고, 그 밖에는 빈부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일수록 시민은 편을 나눠 구속 여부로 사법 정의를 판단한다. 검사는 엄벌에 처하라는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영장 청구를 남발하고 구속을 수사 성패의 기준으로 삼는다. 언론과 정치권은 자기들 입장에 따라 판사의 결정을 지지하거나 비난한다. 이러한 현상은 구속제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왜곡하는 데서 비롯됐다. 영장이 발부됐다고 다 유죄로 선고되는 것이 아니고, 영장이 기각됐다고 처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중요사건에서 영장 기각으로 수사에 급제동이 걸렸다면, 피의사실을 자백하고 여죄를 추궁하는 수단으로 구속을 잘못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이 본래 의도한 사건(본건)을 수사하기 위해 다른 사건(별건)을 이유로 구속하는 별건구속은 본건 사실에 대한 자백을 강요하는 것으로 부당하다. 검사는 영장을 청구할 때 범죄사실을 언론을 통해 기정사실화(유죄 단정)한다. 이 때문인지 시민은 정작 법원의 공개재판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개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대는’ 본말전도의 형사재판은 이제 끝내야 한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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