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간 매일 기록한 노상추..비주류의 설움, 전염병 창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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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평소 그의 조부 노계정의 훌륭한 행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정조가 1792년에 실시된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상추를 발탁, 정3품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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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갑산(甲山) 사람 김철몽(金哲夢)이 와서 알현하면서 함경도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1월 초에 함흥(咸興)을 지났는데 돌림병이 이미 그곳에 도달해서 홍원(洪原) 땅의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8도 사람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조선 무관 노상추의 1770년 윤5월 10일자(전자)와1799년 2월 4일자(후자) 일기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던 기록이 담겨 있다. 가족과 지인이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례는 물론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전염병 때문에 민생이 도탄에 빠져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이 내비친다.
조선후기 무관 노상추(1746~1829)는 1763년(18세)부터 1829년(84세)까지 67년간 매일 일기를 썼다. 현존 조선시대 일기 중 최장기간이다. 일기에는 4대에 걸친 대가족의 희로애락, 각처에서의 관직 생활, 당시 사회의 정황 등이 들어있어 18-19세기 양반의 삶과 조선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조광)는 노상추의 생활일기를 우리말로 번역한 ‘국역 노상추 일기’ 12권을 완간했다.
노상추는 원래 문과를 준비했으나 23살에 문관의 길을 포기하고 무예를 수련했다. 문관으로 출세하기에는 영남 지방의 남인 가문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와 넉넉지 않은 집안 경제사정이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무과로 진로를 바꾼 후 1780년 35세의 나이로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더 걸렸다. 그는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음을 일기에 썼다.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1782년 5월 7일 일기)’
10년 고생 끝에 무과에 급제했지만 그는 그때부터 4년 동안 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1787년 ‘갑산진관’이라는 변방 지역의 말단직에 임명됐는데, 이 날 일기에는 세력이 없어 변방을 전전하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그는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했고 마침내 빛을 보게 됐다. 평소 그의 조부 노계정의 훌륭한 행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정조가 1792년에 실시된 활쏘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노상추를 발탁, 정3품 당상(堂上)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했다. 이듬해엔 삭주부사(朔州府使)가 됐으며, 이후 궁궐 수비를 책임지는 금군장(禁軍將)을 맡는 등 비교적 순탄한 관료생활을 이어갔다.
노상추의 일기는 무관을 폄훼하고 영남 출신 남인을 차별하는 주류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일기의 곳곳에 경조사에 다녀간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관련 상황을 빼곡하게 기록해 두었는데,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가 대단히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국역 노상추 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사이트에서 원문과 국역문 열람이 가능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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