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머리 못 깎는 사법부.. 85% "법관에 맞춘 징계기준 필요" [탐사기획-법관징계 리포트]
법관 징계제 개선 첫 실마리 기대
71% "신뢰도에 긍정적 영향 줄 것"
66% "징계 조항에 파면 없는줄 몰라"
"직무 무관한 범죄 포함돼야" 70%
2006년 신설 논의됐지만 실현 안돼
법조계 실현 가능한 대책 강구 지적
연금삭감 등 해외사례 대안 떠올라
대법원장 독점 징계권한도 도마 위
1993년 5월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이용훈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이 “소속 법관들의 집약된 의견”이라며 꺼낸 말이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몰아닥친 사정 한파 속에서 법원 내부 우려가 담겨 있다. 이런 위기의식이 그해 6월 일어난 ‘3차 사법파동’의 도화선이 됐다.
“대법원장인 저는 전국의 모든 법관들과 더불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세월이 흘러 사법부 수장에 오른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6년 9월 ‘법조 비리’ 사태에 연루된 부장판사가 검찰에 구속되자 “자성하겠다”며 고개를 떨궜다. 당시 이 대법원장이 내놓은 대책도 역시 감찰과 징계 강화였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이 터질 때마다 사법부는 번번이 ‘뼈를 깎는 쇄신’을 약속했다. 지켜지진 않았다. 그동안 폭행과 막말, 성범죄, 음주뺑소니 등 법관 범죄와 비위는 끊이질 않았다. 판사 2명이 억대 뇌물수수로, 전직 대법원장이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 논란과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추진도 그 연장선이다. 사법부가 ‘제 머리 깎기’를 주저하는 사이 국민 신뢰를 얻을 기회는 점점 더 사라져만 갔다. 사법부와 법관이 이토록 빈번하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선진국은 찾아보기 드물다. 사법부 행태에 깊이 실망한 국민은 이제 말뿐인 약속이 아닌 실질적인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법관 징계, 누구보다 엄정해야”
전문가들은 법관 징계제도 개선이 사법부 신뢰회복의 첫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9일 세계일보와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 ‘공공의창’이 공동기획하고 휴먼앤데이터가 실시한 대국민 설문조사(전국 19세 이상 성인 1000명 대상)에서도 전체 응답자의 70.9%가 범죄 판사에 대한 엄정한 징계가 사법부 신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보았다. 재판 경험이 있는 응답자(76.5%)와 재판 경험이 없는 응답자(69.5%) 모두 긍정적이었다.
분석에 참여한 이유봉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판사들처럼) 일부 공무원만 징계 수준이 유달리 낮다는 사실은 공직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판사 업무의 특성을 따져 부적절한 법정 발언 등 사례를 취합하고 유형화해 그에 맞는 징계 기준을 설정해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설문에서 전체의 85%가 ‘법관에 관한 징계기준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81% “죄지은 법관, 파면돼야”
최근 법원 안팎에서는 국회의 법관 탄핵소추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헌법에 명시돼 있긴 하지만, 전례가 없었다. 자칫 탄핵이 사법부 독립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징계’의 관점에서 국민들은 법관도 얼마든지 파면 대상이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다른 부처 공무원이라면 판면될 법한 중대 범죄도 법관이라는 이유로 정직 1년 이하로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받은 게 사실이다.
국민들은 법관 징계 조항에 파면·해임이 없다는 사실을 다수(65.8%)가 몰랐다고 하면서도 뇌물수수나 음주뺑소니 등 중범죄를 저지른 경우 상당수(60.7%)가 파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공무원 징계 수준을 감안해 파면해야 한다’는 응답도 20.3%나 됐다.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답변은 14.3%에 그쳤다.
다만 법원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징계수위에 대한 온도차가 있었다. ‘법원을 신뢰한다’는 응답자의 50.4%가 ‘파면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고 본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자들의 22.1%만 자제해야 한다고 봤다. 법원을 신뢰하는 응답자들은 법관 징계제도 강화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했고, 60대 이상일수록 그 기류가 뚜렷해졌다.
국민들은 탄핵 조건과 관련해선 ‘직무와 무관한 범죄나 비위도 조건이 돼야 한다’고 보았다. 찬성(69.6%)이 반대(20.1%)의 3배 이상이었다. 헌법은 ‘직무상 법 위배’만 법관 탄핵의 조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2006년 7월 정부와 국회, 대법원이 모여 개최한 ‘법조비리 근절 당정협의회’에서 법관의 파면·해임 등 중징계 신설이 논의됐지만 실현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연금 삭감·징계권 분산 등 필요해
개헌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법조계에선 법원과 국회가 보다 실현 가능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016년 대법원이 스스로 제시한 징계 법관에 대한 공무원 연금 및 퇴직수당 삭감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공직자에게 연금 삭감은 치명적이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에서는 법관 징계 수위를 ‘연금이 수령되는 파면’, ‘연금이 수령되지 않는 파면’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강호석 인천시 행정심판위원(변호사)은 “징계위원장을 비롯해 징계위원 과반수가 대법원장 인사권의 영향을 받는 지위에 있는 등 독립성 및 공정성 측면에서 의문이 생기는 구조”라며 “징계위원 구성을 다원화하거나 독립된 징계위원회 설치 등이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장 등 소수만 가능한 징계 청구권의 확대도 방안으로 거론된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은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면 일반인도 법관에 대한 징계를 제도적으로 청구할 수 있다. 이번 설문에서도 ‘국민이 징계를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와 ‘법률 전문가 정도는 징계를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응답이 각각 64.5%, 26.7%로 집계됐다.
오정일 경북대 교수(행정학)는 “다른 공무원이었으면 직위해제부터 됐을 범죄도 법관들은 감봉이나 견책만 받는 등 사회의 모범은커녕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왔다”며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법원이 먼저 스스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조팀=이창수·송은아·김선영·이창훈·이희진 기자 winterock@segye.com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 5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자동응답(ARS) 조사 방식(유선30%·무선70%)으로 진행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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