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옮기느라 힘들었다".. 이범석 재치에 파안대소한 슐츠
김태훈 2021. 2. 10. 06:04
역대 한국 외교장관들과의 인연·에피소드
최근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82년부터 1989년까지 7년간 미국 외교 사령탑으로 일하며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한국에서 그를 상대한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으로는 이범석(1982∼1983 재임), 이원경(1983∼1986 재임), 최광수(1986∼1988 재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범석·최광수 두 전직 장관이 슐츠 전 장관과 관련해 남긴 에피소드가 눈길을 끈다.
◆말로 북한 제압한 이범석 입담 듣고 감탄하기도
9일 외교가에 따르면 이범석 장관은 현직 시절 슐츠 장관과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1983년 2월 슐츠 장관이 취임 후 처음 방한했을 때의 일이다. 양국 외무장관이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전 이 장관이 과거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를 맡았을 때의 일화를 꺼냈다.
적십자회담 당시 서울에 온 북한 대표단은 “자동차를 옮겨오느라 힘들었겠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원래 있던 게 아니고 북측 대표단한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동원한 것이란 비아냥이 담긴 표현이었다. 이에 이 장관은 즉흥적으로 “빌딩을 옮겨오는 건 더 힘들었다”고 대꾸해 북측 대표단의 기선을 완전히 제압했다.
이 얘기를 들은 슐츠 장관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외교 담판의 수사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멋진 위트였기 때문이란 게 당시 사정을 아는 이들의 전언이다. 회담에 배석한 한국 대표단이 “그렇다. 사실이다”고 응답하자 슐츠 장관을 비롯한 미국 대표단 사이에선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고 한다.
2개월 뒤인 1984년 4월 이번에는 이 장관이 미국 워싱턴을 방문했다. 슐츠 장관과 가까워진 이 장관의 행보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워싱턴 한 호텔에서 미국 측 유력 인사 150여명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이 장관은 “전두환 대통령께 ‘워싱턴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전 대통령께서는 ‘슐츠 장관이 서울을 다녀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로 미국에 가느냐’고 물었다”는 말로 운을 뗐다. 이어 “전 대통령께 ‘미국 사람은 부부지간이라도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침저녁으로 쓰면서 살아간다’고 말씀드렸다”며 “슐츠 장관이 한국을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답례로 찾아가서 우의를 전해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다고 건의해 결국 전 대통령 허락을 받았다”고 소개해 미측 인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광수, 슐츠에 비해 아무 손색없는 체구 자랑”
최광수 장관은 한국인으로선 상당히 큰 182㎝의 장신인데다 풍채가 늠름해 늘 ‘거구’라는 말을 들었다. 외무장관으로 일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 외교관들을 상대할 때 적어도 체구 면에선 전혀 밀리지 않았다. 1986년 장관으로 임명돼 전두환정부 마지막 해와 노태우정부 첫 해 우리 외교를 책임진 최 장관은 자연히 슐츠 미 국무장관과도 자주 접촉했다.
1988년 최 장관 주재로 서울에서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공관장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했고, 저녁식사가 끝난 뒤 일종의 장기자랑 같은 간단한 여흥의 시간을 가졌다. 마침 사회를 맡은 최호중 당시 주(駐)사우디아라비아 대사는 최 장관과 외무고시 동기생이었다. 최 대사는 여흥의 마지막 순서로 가창력이 뛰어난 최 장관한테 노래를 시켰다. 그러면서 “최 장관은 미국의 슐츠 국무장관에 비해 아무런 손색이 없는 체구를 자랑하고 있는데 체구보다 뛰어난 것이 외교 수완이고 외교 수완보다 더 뛰어난 것이 노래 솜씨”라고 추켜세웠다.
최 장관을 슐츠 장관과 비교하며 그 풍채와 외교력을 칭찬한 셈이다. 좌중에 폭소가 터진 것은 물론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날 최 장관의 커다란 체구를 슐츠 장관에 빗대 웃음을 자아낸 최 대사는 1988년 12월 최 장관의 뒤를 이어 후임 외무장관에 기용됐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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