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현이 소식에 온몸 '덜덜'..다신 그때처럼 살고 싶지 않아"

이준희 2021. 2. 1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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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현 사건 그후][최숙현 사건 그 후] ③ 떠난 자

"일요일 빼곤 매일 두들겨 맞아"
최 선수 이전에도 폭력은 일상
결국 운동 접어 "이젠 바뀌길.."
경주시청팀 선배였던 서가영
날로 심해지는 감독 폭행에
매일 공포에 시달리다
결국은 운동을 포기했다
최 선수 사건 접한 뒤
몇달 내 몸 아파
기자들 전화 빗발쳤지만
그저 견디는 일밖에 할 수 없어
감독·선배쪽에선 합의 종용
보복 두려워도 끝내 거부
"평생 선수로 살 줄 알았는데.."
남은 건 참혹한 기억뿐
이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다
스포츠계 폭력을 고발한 뒤 떠난 최숙현 선수 이전에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팀엔 또 다른 최숙현들이 있었다. 2016년 4월에도 2017년 12월에도 최숙현들은 매일 맞으며 운동했다. 폭력은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상이었다. 스포츠계 폭력에 사람들이 경악한다는 것에 최숙현들은 의아했다. 최숙현들이 그렇게 맞고 또 맞을 때, 사회가 그 파이프와 빗자루, 밀대, 우산, 신발을 빼앗았다면 22살의 꿈 많던 선수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숙현 사건 전의 또 다른 최숙현들을 기억하는 일은, 지금도 어디엔가 있을 제3의 최숙현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대표 선발전 전날이었어요. 수영훈련 하는데 감독님이 ‘××년아, 니가 ○○이하고 같이 들어오면 어떡하노’ 하면서 옆에 있던 오리발로 엉덩이랑 허벅지를 10대 넘게 때렸어요. 수영선수 출신인 제 성적이 다른 선수와 같다는 거였죠. 다음날 유니폼 입는데, 하체가 퉁퉁 부어서 입기 힘들 정도였어요.”

2016년 4월 경북체고 수영장. 그날은 서가영(가명)이 경북 경주시청팀에서 처음 폭행당하던 날이었다. 팀에 합류한 지 3개월. 19살이었다. 너무 놀라 잊히지도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확실한 건 그 뒤에도 폭행이 이어졌다는 것뿐이다. 김규봉 감독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사람을 때렸다. 손바닥으로 뺨을 때렸고, 주먹으론 머리를 때렸다. 발로 차거나 밟기도 했다. 빗자루, 밀대, 우산, 신발, 오리발.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몽둥이가 됐다.

■ “일요일 빼곤 늘 맞았어요”

초등학교 때 수영을 시작했다. 평생 운동하며 살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뒤 실업팀을 물색했다. 성적이 특출하지 않아, 팀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가족과 오래 알고 지낸 김 감독에게 연락이 왔다. 트라이애슬론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수영은 물론 사이클과 마라톤까지 해야하고, 체력 소모가 심한 종목이라서 겁이 났다. 그러나 운동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고심 끝에 팀에 합류했다.

2016년 1월 뉴질랜드로 첫 전지훈련을 떠났다. 처음 시작하는 트라이애슬론은 어려웠지만, 김 감독은 친절하게 지도했다. 이렇게 적응해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팀 분위기가 엄격했고 때로는 감독에게 맞는 선수들의 모습을 봤지만, 학생 때부터 있던 일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열심히 훈련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한번 시작된 폭행은 점점 심해졌다. 다른 곳과는 수준이 달랐다. 매일 공포 속에 잠들었다. 폭행을 못 견뎌 도망도 쳤다. 다음날 팀에 돌아와, 운동장 ‘뺑뺑이’를 수없이 돌았다. 감독은 분이 안 풀렸는지 숙소 지하주차장에서 알루미늄 우산으로 온몸을 수십차례 때렸다. 우산이 부러지자 숙소로 끌고 올라가 배와 등을 수차례 걷어찼다. 가영은 “일요일 빼고는 안 맞는 날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 2년 만에 끝난 실업팀 생활

서가영은 10월 전국체전을 손꼽아 기다렸다.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대회가 끝나면 팀을 떠나겠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도중에 운동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계약기간을 지키지 못하면 계약금의 몇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야 했다. 1년만 버티면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운동이 즐거울 리 없었다.

김규봉 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감독. 연합뉴스

마침내 전국체전이 끝났다. 감독은 재계약 이야기를 꺼냈다. 거부했다.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감독이 설득했다. 자신의 후배가 감독으로 있는 광주시체육회로 가서 뛰면 어떻겠냐고 했다. 다른 팀에선 괜찮지 않을까.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 아닐까. 당장 먹고살 방법도 마땅치 않은데…. 제안을 수락했다. 이젠 정말 운동다운 운동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헛된 기대였다. 광주시체육회팀은 경주시청팀과 함께 경북 경산에서 자주 훈련했다. 감독이 김규봉의 후배여서일까. 김 감독은 다른 팀 선수가 된 가영을 또 때렸다. 사이클훈련 중 후배보다 늦게 들어왔다고 헬멧을 벗기고 손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체육계를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힌 순간이었다. 2년의 실업팀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 ‘경주시청팀’이라는 악몽

숙현이 소식을 들은 건 운동을 접고 3년이 흐른 뒤였다. 수영장 등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때였다. 전지훈련이 끝난 뒤면 선물을 사다 주던 숙현이의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숙현이가 폭행 때문에 죽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 역시 폭행 피해자였지만, 그에게 운동과 폭력은 떼놓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며칠 지나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숙현이도 매일 맞았다. 세상은 그런 숙현이를 외면했다.

고 최숙현 선수. 트라이진 제공

일주일 동안 별다른 일이 없었다.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용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숙현의 죽음을 알렸다.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숙현이 아버지가 뉴스에 나왔다. 음식고문 등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가 나와 놀랐다. 매일 맞고 살았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될까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하는 게 의아했다. 그곳에선 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이 벌어졌는데, 사람들은 일부 사례만 보고도 들끓었다. 그곳이 지옥이었구나. 그제야 깨달았다.

그해 7월 내내 몸이 아팠다. 몸살에 걸린 것처럼 몸이 떨렸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위가 부어올랐다고 했다. 3일 동안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밥도 먹지 못해 링거를 맞았다. 코로나19로 일자리가 끊기면서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어딜 가도 경주시청팀 이야기가 뉴스로 나왔다. 옛 동료들은 페이스북에 청와대 국민청원과 관련 기사를 공유했다. 종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기자들이었다. 모두 받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견디는 것뿐이었다.

고 최숙현 선수의 아버지 최영희씨가 지난해 7월10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일명 ‘고 최숙현법’ 발의 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 다시는 누군가 죽지 않도록…

한번은 김 전 감독의 가족에게 전화가 왔다. 합의하자는 것이었다. 합의금으로 내놓은 금액은 300만원. 셀 수 없이 이뤄진 폭행과 부서진 운동의 꿈을 보상하기에 그 돈은 그저 농담 같았다. 팀 선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우리가 잘못해서 맞았던 것 아니냐. 합의하자.” 참을 수 없었다. 합의를 거부했다. 지난달 22일 팀닥터 행세를 하던 안주현의 1심 선고가 난 뒤에야 몸살이 잦아들었다. “사실 무서웠어요. 근데 이제 끝났으니까요. 좀 나은 것 같아요.”

평생 운동선수로 살 줄 알았다. 이젠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다. 운동을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선수 시절 사진도 모두 지웠다. 남은 건 참혹한 기억뿐이다. 폭행당하지 않았다면, 그때 경주시청팀에 가지 않았더라면, 운동을 계속했을까. 아니다. 운동하진 않았을 거다. 매 맞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으니까.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지난해 7월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진상규명 및 스포츠 폭력 근절,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국회 긴급토론회’의 모습. 박종식 기자

매번 기자들의 전화를 피했지만 용기를 내 인터뷰에 나섰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이번 일도 그렇지만, 항상 뉴스에 누구 한 사람이 죽어야 이렇게 되는 것 같아 맘이 안 좋아요.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정부나 기관에서 잘 관리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에요.” 소박하되, 간절한 바람이었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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