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서 평양까지..시인과 화가의 우정은 뜨거웠다
오늘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과 그 시인이 사랑했던 화가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함께 정갈한 시화를 하나 만들었다. 이 시화가 83년 만에 전시장에 들어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1912~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이 시구를 화가 정현웅(1911~1976)이 주황빛의 삽화를 곁들여 인쇄한 이미지가 반갑게 다가온다. 1938년 3월 <조선일보>가 펴냈던 잡지 <여성> 3호에 처음 실렸을 당시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이미지다. 시인 백석의 벗인 화가 정현웅은 당나귀와 나타샤의 이미지를 독특한 구도로 살려냈다. 주황빛 색면에 흰 여백으로 당나귀의 정감 어린 모습을 표현했다. 시와 그림이 결합한 당대 화문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두 사람은 당시 경성 태평로 <여성>의 편집실에서 함께 일했다. 백석을 아낀 정현웅은 그의 옆모습을 공들여 스케치한 그림에 ‘미스터 백석’이라고 제목을 붙인 짧은 글을 1939년 7월 <문장>에 싣는다. ‘미스터 백석은 바로 내 오른쪽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오리기도 하고 와리쓰게(레이아웃)도 하고 있다. (…) 미스터 백석의 프로필은 조상(彫像)과 같이 아름답다. (…) 서반아 투우사의 옷을 입히면 꼭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백석 또한 1939년 10월 <조선일보>를 떠나 만주로 가는 길에 ‘정현웅에게’라고 부제를 단 유일한 인물 헌정시 ‘북방에서’를 보내며 우정을 다졌다. 그들은 10년간 서로 보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뒤 패주하는 인민군을 따라 정현웅이 월북하면서 평양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시 창작은 거의 포기하고 러시아 문학서를 번역하고 아동문학책 발간에만 진력하고 있던 백석에게 정현웅은 다시 초상을 그려줬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의 억센 필선으로 찍어낸 단순 명쾌한 초상화를 1957년 나온 백석의 동화집 <집게네 네 형제>에 실어줬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 말, 백석은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하방돼 양치기와 농사일만 하게 되고, 둘은 다시 헤어지게 된다. 그 뒤로 1976년 정현웅이 세상을 등지고 딱 20년 뒤 백석도 세상과 작별한다.
지난 4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새해 첫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는 북한에서 최후를 맞은 두 걸출한 예술가 백석과 정현웅의 사연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눈이 차고 가슴이 아린다. 일제강점기 경성과 북한의 평양에서 만남과 공동창작의 희열을 누렸으나 이별을 되풀이해야 했던 그들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정현웅의 월북 뒤 둘은 어떻게 교분을 이어갔을까. 숙청 뒤 정현웅은 계속 백석을 만났을까. 그림과 글을 보며 꼬리를 물고 상상하게 된다.
전시는 두 사람 외에도 1930~50년대 정지용, 이상, 김기림, 김광균, 구본웅, 김용준, 최재덕, 정현웅, 이중섭, 천경자, 김환기 등 문인과 미술가들이 모순과 첨단의 시대를 읽고 어울려 의지하며 영감을 주고받은 자취를 140여점의 작품과 시집·잡지 등 500점 넘는 시각 자료를 통해 처음 재조명한다. 일일이 문인과 화가의 유족을 찾아다니며 발품 들여 찾아낸 미공개 작품과 자료가 수두룩하다. 월북 작가 최재덕이 친우인 시인 김광균에게 남기고 간 아름다운 색채 풍경화인 <한강의 포플라 나무>, <문장>의 편집자 조풍연의 1941년 결혼기념 화첩에 나온 김환기의 공작 그림과 역시 40년대로 추정되는 추상회화,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백석의 시집 <사슴>을 비롯한 숱한 문인들의 시집 원본을 구경할 수 있다.
전위와 융합, 지상(紙上)의 미술관, 이인행각(二人行脚), 화가의 글·그림 등 4개 전시 영역으로 이뤄진 이 기획전은 흔히 빈한한 시대, 뒤떨어진 시대라 여겼던 일제강점기와 해방 시기에 문인과 화가들이 어울려 풍요롭고 깊은 예술세계를 일구며 현대 한국 문화예술의 토양을 닦았다는 사실을 확고한 사료들을 통해 일러준다. 5월30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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