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금융회사? 정부 금융기관으로 되돌아간 신세
“우리는 그동안 ‘금융회사’를 ‘금융기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부 주도의 ‘관치(官治)’와 규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금융기관’을 ‘금융회사’로 불러야 합니다.”
지난 2009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었던 곽승준 고려대 교수는 한 세미나에서 ‘금융기관’이라는 명칭을 문제 삼았다. 정부 기관을 떠올리게 하는 금융 ‘기관'은 관치 금융의 산물로 잘못된 용어이니, 앞으로는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다른 민간 업체들처럼 금융 ‘회사’라는 표현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도 “금융기관은 잘못된 표현”이라며 공감했고, 이후 금융기관이란 용어 사용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금융기관의 시대로 되돌아갔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여당이 금융회사 경영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는 9일 은행 점포 폐쇄 때 사전영향 평가 등을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은행 점포 폐쇄 관련 절차 개선안’을 발표했다. 앞으로 은행이 점포를 폐쇄하려면 외부 전문가 등으로부터 사전영향평가를 받으라는 것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비대면 금융 활성화로 역할이 사라진 지점 폐쇄조차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도록 한 것”이라며 “관치 금융의 부활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금융회사에서 금융기관으로의 퇴행 현상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강화되고 있다. 2017년 10월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회사에 왜 ‘기관’이라는 단어를 붙여 ‘금융기관’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며 금융회사들의 공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정부와 여당은 코로나 사태가 터진 뒤 ‘금융기관의 역할’을 내세워 금융회사들에 각종 청구서를 들이밀고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은행들은 각종 금융 안정 펀드 출자와 코로나 대출 만기 연장 및 이자 상환 유예 등 지원책에 동원됐다. 결국 은행들은 현재까지 116조원의 대출 만기 원금과 1500억원 규모의 이자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 28일에는 금융위원회가 금융지주사에 배당 성향을 20% 밑으로 낮추라고 권고했다. 작년 우리금융의 배당 성향이 27%, KB금융 26%, 하나금융 26%, 신한금융 25%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4대 금융지주들은 배당 성향을 5~7%포인트가량 낮춰야 하는 것이다.
거대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아예 “대출 원금을 감면해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지난 2일 은행법·금융소비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코로나 사태와 같은 재난이 발생해 영업이 제한되거나 소득이 감소한 사업자들은 은행에 대출 원금 감면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기준에 부합하면 은행들은 의무적으로 이를 수용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외에도 ‘햇살론’ 등 취약계층 지원에 사용되는 ‘서민금융기금’에 은행들이 1100억원가량 새로 출연하는 내용을 담은 서민금융법 개정안도 발의된 상태다.
압력이 거세지는데도 은행들은 대응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제 목소리를 내야 할 주요 금융사 CEO들이 사모펀드 사태 책임으로 줄줄이 금융 당국의 징계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당국이 CEO의 목줄을 쥐고, 각종 청구서를 들이미는 셈이다. 징계 대상인 한 금융사 CEO는 “법도, 근거도 없이 금융권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금융사들도 엄연히 주주가 있고, 경영진이 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하소연했다.
관치 금융의 결과는 주가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최근 3개월간 한국 주식시장이 급등했지만 국내 은행들의 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최근 3개월간(11월 10일~2월 8일) 코스피가 26% 상승하는 동안 4대 금융지주의 평균 주가 상승률은 2.8%에 불과했다. 국내 은행 업종 시가총액 1위인 KB금융 주가는 최근 3개월간 0.8% 오르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4국의 대표 은행들의 주가는 평균 12.3% 상승했다. KB금융보다 주가 상승률이 낮은 은행은 한델스방켄(스웨덴), ABN아르포(네덜란드), 도이치방크(독일), 노르디아(핀란드) 등 4곳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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