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쓰러진 '56년 현역 의사' 안타까운 이별 애도합니다"

한겨레 2021. 2. 9. 22: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신이의 발자취] 분당 '장내과' 장청순 원장님을 기리며
지난해 연말 확진 환자에 감염
한달남짓 만에 별세..향년 87
서울대 의대 나와 1965년 개원
"과잉진료 없고 한결같이 성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오랜 단골들
"다음 생에도 의사로 우리 곁에"
지난 1월24일 별세한 고 장청순 장내과 원장, 향년 87. 유족 원선영씨 제공

지난 1월 27일 ‘코로나 환자 진료하다 감염된 80대 내과의사 끝내 숨져’라는 뉴스가 나왔다. 지난해 연말 코로나19 확진 사실을 모른 채 찾아온 환자를 진료했다가 며칠 뒤 확진 판정을 받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상태가 나빠져 지난 1월2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의료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감사하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80대 의사가 아직도 현장에서 진료를 했어?’라는 놀라움섞인 되물음이었다.

그 의사는 바로 경기도 성남시에서 장내과를 운영해온 장청순 원장이다. 1935년생, 향년 87. 1960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65년 개원해 56년 동안 의료 현장을 지킨 여성 내과전문의였다. 애초 서울 상도동에서 시작했던 고인은 1993년께 분당으로 옮겨 같은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일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진료를 받았던 ‘젊은 세대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장 원장님의 성실한 삶을, 안타까운 죽음을 기록해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수준에서 두 번째 반응에 대해 설명을 전하고 싶다.

내가 장내과를 찾아간 것은 5년 전쯤, 성인병의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겠다 싶어서였다. 집 바로 앞 중형병원, 젊은 의사가 새로 개원한 곳을 헤치고 700미터쯤 떨어진 장내과로 간 이유는 오래된 환자들이 많고, 과잉진료가 없다는 이웃들의 추천 때문이었다.

장내과의 진료실에 들어가면 원장님은 펌프로 압력을 주는 옛날 방식 혈압계로 혈압을 측정하고(두 해 전부터는 디지털식 자동 혈압계로 바꿨다), 혈당을 검사해주었다. 옆에 간호사가 있어도 직접 다 했다. 과도한 검사도 없고, 최소한의 약만 처방했다. 조금 나아졌거나 안정적인 수치가 보이면 먹던 약을 바로 끊도록 했다.

시설이 낡고 오래된 의원이라 새로운 환자는 거의 없었다. 다닌 지 10년을 훌쩍 넘은 단골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평균 연령은 60~70대쯤이었다. 그나마도 환자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장님은 매일 오전 9시면 정확하게 병원 문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다. 정갈하게 화장을 하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환자를 맞았다. 꼭 필요한 말만 했고, 과한 친절도 없었다. 정확하고, 빈틈없이 진료하고, 잉여 없이 처방했다. 모든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았다. 어느 해 여름에는 따님과 여행을 가느라 며칠 병원을 쉰다고 미리 얘기해주기도 했다. 혹시라도 환자가 헛걸음을 할까싶은 걱정과 배려가 담겨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장내과는 보건소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늘 자리를 지키며 언제나 문을 열어 놓는 보건소 말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 장내과 입구에 고 장청순 원장을 애도하는 환자와 시민들의 조화가 쌓여있다. 이정주 작가 제공

장 원장님이 87살까지 진료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새로운 배움’이었다. 고령에도 컴퓨터를 배워 처방을 했다. 프로그램에 저장되어 있는 항목을 클릭하고 독수리 타법으로 숫자를 입력하는 정도였지만, 그 연배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스마트폰도 젊은 사람들에게 배워서 불편없이 쓴다고 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시하는 조사에 참여해 ‘좋은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내과 관련 학술 세미나에도 종종 참가한다고 했다.

뒤늦은 한탄이지만, ‘코로나19 유행 초기부터 아예 병원을 닫았으면 이렇게 가지는 않으셨을 텐데….’ 싶기도 하다. 평소 연세에 비해 건강한 분이라 더 더욱 허망하다. 하지만 장 원장님은 그렇게 병원을 닫을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환자가 하루에 한 명 오더라도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게 그 분의 인생관이고 삶의 자세였다. 역시 의사인 따님은 “어머니는 오랫동안 집과 진료실이 붙어있는 곳에 사시면서 새벽 1시에도 환자가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정년없는 좋은 직업’이니 그렇게 오래도록 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 원장님의 대부분 남성인 의대 동기들은 현역을 떠난 지 오래라고 들었다. 내가 아는 고인은 의사가 아닌 그 어떤 직업이었어도 자신이 맡은 일을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했을 분이다. “나이도 들었고, 돈도 벌었고, 자식들도 잘 키웠으니, 노년을 즐기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수십년 단골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키는 것이 ‘장청순답게’ 노년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장 원장님을 보면서, 나도 80대까지 건강하게 살게 된다면, 그렇게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이를 핑계로 흐트러지지 않고, 늙었다고 게으름 피우지 않는 노년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는 그 성실함을 닮고 싶었다. 환자가 없는 시간에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일본어 소설책을 읽던 낭만도 ‘닮고 싶은 노년’의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이 글로나마 ‘나의 주치의’ 장 원장님에게 고마움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장 원장님! 다음 세상에도 의사로 와 주세요. 그때도 저는 원장님 병원이 있는 동네에 살고 싶어요.”

이정주/어린이책 작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