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성별이분법적 교육 과정'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오경민 기자 2021. 2. 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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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마다 차별 직면..병원 방문 등 일상적 용무 어려워
구직 경험 응답자 절반 이상은 정체성 문제로 일자리 포기
87%가 "문재인 정부, 성소수자 인권 증진 위한 노력 없어"

[경향신문]

남과 여, 두 성으로만 사람을 구별하는 ‘홀수와 짝수의 세계’에서 트랜스젠더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생애주기마다 심각한 차별에 직면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9일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서 응답자 554명 중 193명(34.8%)은 “일상적 용무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트랜스젠더는 신분증을 요구하는 모든 곳에서 불편을 겪는다. 이 중 가장 많은 이가 방문을 꺼리는 곳은 의료기관이다. 119명(21.5%)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박한희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진료 접수를 할 때 주민번호를 불러주면 다 들리게 ‘남성이 맞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며 “안과나 치과같이 성별 구분이 필요 없는 곳에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병원에 가기 어려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공적마스크 구입 시 신분증을 제시해야 했던 지난해 봄에 “마스크 구입이 어려웠다”고 답한 이들도 응답자의 14.6%인 86명이나 됐다.

최근 5년간 구직 경험이 있는 응답자 469명 중 268명(57.1%)은 정체성 문제로 일자리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입사 취소나 채용 거부를 경험한 이들도 74명(15.9%)이나 됐다. 이호림 고려대 보건과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은 “노동시장 진입부터 순탄치 않다 보니 비정규직이 많거나 소득이 낮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서도 월평균 임금이 “없다”고 답한 참여자가 326명으로 응답자의 55.4%로 집계됐다. ‘100만원 미만’과 ‘100만~200만원’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각각 77명(13.1%)과 97명(16.5%)이었다.

학교 역시 트랜스젠더가 배제되는 공간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닌 참여자 584명 중 539명(92.3%)은 “학교 환경이나 제도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원인은 성소수자 관련 성교육 부재(69.2%), 정체성에 맞지 않는 교복 착용(62.3%),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탈의실 부재(각각 51.7%·45.9%) 등으로 다양했다. 트랜스젠더들이 가장 시급하게 제도 개선이 필요한 영역으로 꼽은 것도 ‘초·중·고 교육 과정’이었다. 해당 질문 응답자(중복 답변 가능)의 97.3%인 574명이 ‘성별이분법적 교육 과정’이 문제라고 답했다. 포괄적차별금지법 부재(96.4%)나 의료 트랜지션(자신이 원하는 성별 표현을 위해 받는 의료 조치) 관련 국민건강보험 미적용(96.3%)이 뒤를 이었다.

트랜스젠더들은 과도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응답자 중 “사람들이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과하게 남성적’이거나 ‘과하게 여성적’이어야 한다”고 답한 사례가 278명(47.2%)이었다. 이혜민 고려대 보건과학과 박사과정 연구원은 “연예인 하리수씨가 광고에 나왔을 때도 광고 카피가 ‘여자보다 더 예쁜’이었다”면서 “여성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동시에 여성이라면 가늘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프레임을 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는 트랜스젠더 인권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가 공백이다. 국내 제도 중 트랜스젠더를 직접 다루는 것은 대법원의 호적 예규 제716호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허가신청 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 유일하다. 트랜스젠더가 의료 트랜지션이나 법적 성별 정정에 대한 공식적인 정보를 얻을 창구도 전무하다. 인권단체들이 협업해 운영 중인 ‘트랜스로드맵’ 사이트에서 일부 정보를 제공하지만 민간단체라 한계가 있다.

응답자 87.0%(514명)는 “현 정부가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박한희 변호사는 “지난해 6월 국회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 반 년이 넘도록 청와대나 정부에서 어떤 공식적인 지지 반응도 없다”며 “오히려 5년마다 수립되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서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있었던 ‘성소수자’ 목차를 빼버리는 등 후퇴한 부분도 있다”고 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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